잿빛극장 (2022)
잿빛극장(2022, 온다 리쿠)
‘일상, 참으로 불가사의한 단어가 아닐까’
소설 <잿빛극장>의 ‘나’는 40대 여성 둘의 동반 자살을 소재로 한 소설을 출간한다. 주인공이 아는 건 ‘1994년 4월 29일, 니시타마군 오쿠타마 마을의 기타히가와 다리에서 40대 여성 둘이 잇달아 뛰어내렸다, 사내 사립대학 동기였던 둘은 동거 중이었다’는 내용의 몇백 자의 짤막한 기사뿐이다. 일면식 없는 두 생(生)의 종결을 알리는 건조한 단어 사이사이로, 주인공은 드러나지 않은 그들의 모습과 삶을 상상한다.
주인공의 소설이 연극 무대에 오른다. 소설이 연극 무대나 영화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활자 사이에 존재하던 개별적인 공상의 영역은 실존하는 단어와 이미지로 축약되고 정의된다. 연출자의 의도에 따라 해석되고 표현된 ‘실재’는, 실존했던 삶보다 더욱 실감나고 극적으로 표현되어 사실을 압도하는 진실로 오해받기 쉽다. 주인공은 의도와는 다르게 자신의 호기심으로 왜곡되고 소비될 삶에 대해 끊임없는 초조함과 불안으로 답 없는 질문을 이어가고, 때때로 환영을 본다.
홍보 영상 촬영 차 이야기의 현장을 찾는다. 대다수의 기억에서 사라진 사건은, 같은 날 같은 시각 일면식 없는 두 넋을 기리러 온 사람들로 주목받는다. 관광객들은 이내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며,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두 사람의 모습과 사정을 속단한다. 안타깝게도 생각의 깊이나 기간과 무관하게, 그 자리의 추모객과 관광객만큼이나 작가인 주인공 역시 둘의 삶에 대해 무지한 건 매한가지다.
일상은 빈틈없이 이어진다.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고, 먹고, 씻고, 자잘하고 하찮은 일들이 빈틈없이 그 삶을 메우고 있다. 보이는 삶은 편집된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일상의 상당 부분을 생략한 채, 분절되고 확대, 축소되어 사진과 영상, 글로 옮겨진다. 2시간 남짓의 영화, 소셜미디어의 몇 컷, 책 한 권으로 옮겨진 삶은 극적이지만, 실재하지 않는다. 내 삶에 대한 이야기도 이럴진대, 일면식 없는 타인의 삶은 그 속내를 알 길이 없다. 우리는 타인과 타인의 삶을 그저 우리의 방식으로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삶이 무너지는 계기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개체 수만큼 다양하다. 결정적인 계기가 있을 수도 있지만, 평범하게 보이던 일상 속에 쌓여가던 피로와 불안의 무게에 어느 순간 툭, 부러지기도 한다. 유서도 없이, 단 몇 줄의 기사로 다뤄진 둘의 죽음도, 일상의 크고 작은 절망이 모여 어느 순간 버티지 못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풀어간 이야기 속 두 여성의 마지막모습은 지극히 평범하다.
네 명의 배우가 둘을 번갈아가며 연기한 소설 속 연극 무대처럼, 소설은 작가인 ‘나’와 ‘내’가 상상한 두 여성의 시점을 오가며, 죽음을 시작으로 삶을 추측해 나간다. 추측은 상상에 그치지만, 시공간을 넘나드는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 죽음과 맞닿은 매일의 삶을 떠올린다. 나도 모르게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 조금씩 쌓여가고 있는 건 아닐까.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를 잃고 달리기만 하는 삶은, 어느 순간 그 무언가에 압도되어 무너지기가 너무도 쉽다.
일상.
<잿빛극장> p. 264
이 단어는 겉모습만 보고 깜빡 속아 넘어가기가 쉽다.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끊임없이 흘러가는 나날. 도도한 표정으로 ‘이게 보통이에요.’라고 툭 한마디 던지고는 저만치 서 있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하기 그지없어서 우리를 안심시키고 선뜻 몸을 내맡기도록 유인한다. 그러다 보니 마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기가 십상이다.
하지만 거기 함정이 숨어있다. 똑같이 반복되는 듯 보여도 그 이면에는 야금야금 뭔가가 진행되고 조금씩 쌓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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