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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자, 윤여정, 최진리, 그리고 우리에게

다큐멘터리 영화 <진리에게>는 ‘설리’로 불리던 가수이자 배우 최진리의 생전 인터뷰와 영상 기록을 엮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다소 날 선 질문에 그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카메라는 줄곧 비춘다. 생전에 그를 잘 알지 못했고, 여전히 잘 알지 못한다. 다만, 어떤 연유에서인지 과도한 관심과 비난이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확실히 아는 것도 있다. 그는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5년의 삶을 놓아버린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스크린에는 내내 슬픔이 감돈다. 끝내 다 볼 수 없어 멈춘다. 그래도 살아보지 그랬어, 라는 말은 나조차도 자신이 없다.

출처: 부산국제영화제 <진리에게> 스틸컷

배우 김혜자는 죽음에 닿아있던 우울을 고백한다. 그는 열일곱, 열여덟 살쯤에는 살기가 싫어 수면제를 사 모았다. 마음 한편으로 죽는 것이 두려워 지인에게 그 사실을 말한다. 그 덕에 수면제를 삼키고도 목숨을 구했다. 대학 시절, 열망만 가지고 배우가 됐지만 자신의 부족함에 결혼과 육아로 도피한다. 아이가 제 발로 서고 친구를 찾을 나이가 되자 숨어있던 허무와 죽음에 관한 생각이 다시금 모습을 드러냈다. 자구책으로 찾은 신경정신과 의사는 그를 앞에 두고 딴청을 피우는데, 되려 그 모습에 ‘그냥 네 힘으로 살아. 네 힘을 다해, 죽지 마.’라는 결심을 하고 나온다. 우연히 길에서 만난 선배가 연극을 권유했고, 그렇게 오른 무대에서 연기의 기초부터 행복과 분투의 생(生)을 쌓아나간다.

그의 삶과 연기에 대한 여러 이야기를 담은 책 <생에 감사해>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 까닭 없이 우울하고 절망하는 것은 나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며, 또 책을 통해 알았다.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부조리 연극의 배우들이다. 단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절망감과 우울함 속에서도 스스로 힘을 내어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삶이고, 그것이 인간이다.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 순탄한 삶을 살았을 것 같은 그의 안팎에 요동치던 죽음과 허무는, 생의 의지와 만나 자신을 극한까지 밀어붙이며 누군가의 인생을 연기하는 힘이 된다. 엄마와 아내로서 너무도 부족하기에 연기만은 완벽하게 해내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는, 자신의 역할로 조금이라도 보는 이에게 희망을 줄 수 있기를 소망하며 전력을 다해 연극 무대와 스크린에서 활동해 왔다. 1962년 KBS 공채 탤런트 1기에 합격한 이래 연기 활동에 발을 들인 후, 지금까지 말이다.

조금은 결이 다른, 동년배의 -엄밀하게는 선후배 관계인- 배우 윤여정은 2021년 한국 배우 최초로 오스카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1947년생인 그가 74세가 되던 해였다. 1966년 연기 생활을 시작한 그는 데뷔 초부터 주연급으로 활약하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1971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화녀>를 통해 대종상 신인상과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동시에 받는 등 큰 성공을 거둔다.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는 결혼 후 미국으로 건너가 13년을 살고 귀국 후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두 아이의 양육을 위해 연기 활동을 재개하려 했지만, 이혼이라는 낙인, 너무 마르고 목소리가 이상하다는 이유로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미국에서 식료품점 계산원으로 일하며 최저 임금을 받으며 두 아들을 부양할 생각도 했다. 그렇게 단역 등 가리지 않고 일을 하던 시절을 지나 스크린과 안방극장에서 본격적으로 입지를 다시금 굳히게 된다.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This is the result, because mommy worked so hard)”라고 오스카 트로피를 쥔 그가 이야기했다. 쟁쟁한 후보들 사이에서 자신이 조금 더 운이 좋았던 것이라는 겸손과, “나는 제2의 누구도 아닌 바로 윤여정”이며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당당함을 겸비한 그가 궁금해진 것은 그다음 해 오스카 시상식 때문이었다. 시상자로 무대에 선 그는 수상자인 청각장애인 배우 트로이 코처의 이름을 부르기 전, 서툰 수화로 코처가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는 축하를 건넸다. 그리고 트로피를 줬다가 다시 가져가 옆에 선다. 청중을 잠깐 갸우뚱하게 했던, 통상 시상 후 무대에서 내려가는 것에 반했던 그의 행동은 수화로 수상 소감을 전해야 했던 트로이 코처를 위한, 연출되지 않은 배려였다.

tvN의 예능 <뜻밖의 여정>은 오스카 시상자로 나선 그의 며칠을 담았다. 매일 컨디션 관리를 위해 운동을 하고, 인터뷰를 준비하고 연습하거나 화보 촬영, 녹화 스케줄을 소화한다. 드라마 <파친코> 홍보 중 한국 역사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빼곡히 답변을 준비한 A4 용지들이 이면지라는 제작진의 말에 ‘전쟁을 겪은 여자’라고 응수하는 그는 장 본 후 가져온 비닐봉지를 차곡차곡 개어놓고 요긴하게 쓴다.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은 소탈한 그다.

메이크업이며 의상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온종일 굶은 채로도 카메라 앞에서 미소를 잃지 않고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마이크에 특유의 위트 섞인 솔직한 대답으로 응하는 그에게서, 오랜 세월 ‘프로’로서 지켜온 신념과 노력은 자연스레 묻어나왔다. 그런 그의 곁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나 67살이 처음이야. 아쉬울 수밖에 없고, 아플 수밖에 없고, 계획을 할 수가 없어.” 2014년 <꽃보다 누나>의 인터뷰로부터 8년이 지나 오스카 시상자로 나서는 그는 이야기한다. “우리는 매일이 처음이잖아. 살아있는 사람이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생각을 하는 한 고민이 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한번 살아볼 만은 해. 재미있어.”

다시 설리의 인터뷰를 본다. 자신이 없던 삶에서 자신을 찾아가려던 분투 끝에, 그는 더 이상 세상에 없다. 그가 견디고 있었을 삶의 무게와 우울의 깊이는 그 누구도 감히 가늠할 수 없다. 그저 모두가 같은 인간으로서 그에게, 서로에게 좀 더 친절했다면 세상을 일찍 져버린 그들이 지금도 싱그러운 웃음을 지으며 우리 앞에 있을 수 있었을까.

이유 모를 미움, 근거 없는 소문, 온갖 억측과 비난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성할 사람은 없다. 남 앞에 서고 보이는 자리일수록 쏟아지는 것들은 더 비인간적이고 가혹하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생의 고단한 분투에 더해, 24시간 쉴 새 없이 가십을 소비하고 생산하는 구조로부터 스스로를 떨어뜨리기 위한 부단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 고단함에도 지치지 않고 사람다움을 지켜나가며 저마다의 오늘을 살아간 서로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 드라마 <눈이 부시게>

떠나간 당신들과 이곳의 우리 모두 평안하길. 오늘도, 내일도.

참고/ 더 알아보고 싶다면,

출처: 교보문고
출처: 페르소나: 설리 (미스틱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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