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패스벤더

스크린의 기록영화

엑스맨: 아포칼립스 (X-Men: Apocalypse, 2016)

엑스맨: 아포칼립스 (X-Men: Apocalypse, 2016) – 시리즈가 우리에게 남긴 것 시장통에서 허름한 차림의 한 아이가 순식간에 돌풍을 일으켜 좀도둑질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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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의 기록영화

프랭크 (Frank, 2014)

프랭크(Frank, 2014) – 프랭크의 가면을 마주한 우리의 표정 http://flyingneko.egloos.com/4046492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로 살고 있을까. 자신도 모르는 새 하나 둘 늘어난 가면은 시시각각 필요에 의해 바뀌고 또 바뀐다. 태생적으로 다양한 사람과 상황을 마주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사회적 동물로 살아남기 위한 진화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더 많은 종류의, 다양한 표정의 가면을 가지게 된다. 영화의 제목과 동명인 프랭크의 가면은 하나다. 프랭크는 미키 마우스의 머리를 방불케 하는 큰 가면을 한시도 벗지 않는다. 무언가에 놀란 듯하면서도 즐겁기도, 슬프기도 한 아리송한 분위기의 가면은 늘 같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마주한다. 노래를 부를때도, 먹고, 씻고, 심지어 잘 때조차 눈을 부릅뜬 한결 같은 모습이다. 프랭크를 처음 본 사람들은 가면 속 그의 모습을 흉측하거나 장애가 있거나, 말 못할 사연이 있을 거라고 짐작하거나 묻는다. 이러한 궁금증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는다. 존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집요하게 궁금해하지 않는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마주한 표정에 따라 바삐 가면을 바꿔야 했던 사람들은 오히려 한결 같은 프랭크의 가면에 대고 자유롭게 감정을 쏟아낸다. 즐거움과 슬픔을, 간절함과 욕망을 토로한다. 프랭크는 ‘환영의 미소’, ‘뿌듯한 표정’과 같은 짤막한 단어로 자신의 표정을 설명할 뿐이다. 프랭크의 가면은 가면 속의 사람을 대변한다기 보다, 그를 마주한 사람들의 표정과 욕구를 비춘다. 그렇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프랭크는 자신의 음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한다’며 밀어붙이는 존과 같은 인물들을 탓할 수 없다. 사람의 욕심은 물과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므로. 그것이 단지 표정 없는 프랭크에 투영이 되었을 뿐, 악의를 품고 이용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프랭크는 어쩌면 사람들의 이런 보이지 않는 기대에 서서히 무너진 것일 수도 있겠다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화목한 가정에서 천부적인 음악적 재능을 지니고 자란, 순수한 프랭크가 장난 삼아 시작한 가면놀이가 어느새 그 가면을 쓰지 않고서는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닐까. 가면을 벗은 자신의 표정을 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할지에 대한 두려움이점점 더 가면 속으로 그를 몰아넣은 것일지도 모른다. 프랭크의 가면을 마주한 등장 인물들처럼, 프랭크의 가면, 영화를 채운 영상과 음악을 두고도 관객들은 제 각각의 생각을 담아낼 것이다. 이 한 편의 영화에 어떤 이는 웃고, 어떤 이는 울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세상의 모든 영화가 프랭크의 가면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일방적인 얼굴로 관객을 바라보는 영화는 정해진 것 이외의 어떤 표정도 관객에게 보이지 않는다. 영화가 우리를 보는 표정은 우리만이 아는 것이다. 영화의 좌초와는 무관하게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표정으로 영화를 볼 것이다. 다행인 것은 프랭크와는 달리 영화는 마주한 사람들의 표정에 상처받거나 애써 외면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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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2012)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2012) – 인류의 불안과 호기심이라는 동전의 양면 flyingneko.egloos.com/3851937  몹시 피곤한 상태에서 봤음에도, 거기다 <에이리언>은 어릴 적 어디선가 본 기억조차 끈적한 느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메테우스>에 꽤 만족했다. 사실 <에이리언>의 단서가 될 수도 있는 소재가 등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를 <에이리언>의 (완벽한) 프리퀄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여튼, 2090년대의 우주 탐험이라는 설정에 걸맞은 비주얼도 비주얼이었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니 보는 내내 영화가 역으로 던졌던 질문들이 맴돌았다. 태초부터는 아니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많은 것을 창조하고 생산하고 있으며, 심지어 생명의 연장이나 복제와 같은, 어쩌면 신의 영역을 넘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근원에 대한 풀리지 않는 질문을 콤플렉스처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이 질문에 대해서 이미 많은 가설이 제기되어 왔지만 이 영화에는 누군가에 의해 인간이 설계되고 만들어졌다는 관점과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일부로부터 형성되었다는 관점이 혼재한다. 영화의 서두에서 젊은 ‘엔지니어’는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는데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데, 이는 각본을 담당한 데이먼 린드로프가 한 인터뷰에서도 밝힌 것처럼 기독교적인 관점이 아닌 신들 자체 혹은 그들의 일부를 희생해 인간을 만들어냈다는 여러 신화에서 착안한 것 같다. 복잡하게도 영화 자체는 어떤 관점도 부정하지 않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다. 기독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인류의 기원을 위해 우주선에 몸을 싣고 있는 그들의 딜레마는 어떠했을까. 동시에 절대 영역의 신이 아닌 외계의 고등 생물체로부터 자신들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발상은 신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었던 절대 영역이 ‘넘볼 수 있는’ 범위로 들어오고 기술의 발달로 그들을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게 한다. 광속으로 날아가도 2여 년간 잠들어 있어야 하는 긴 여행 끝에 무엇을 마주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보다 큰 호기심으로 잊혀진 듯 하다. 인간의 호기심은 그래서 대단하고 무섭다.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많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인간의 모습이야 굳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발견할 수 있지만, 이 영화의 제목과 그들이 탄 우주선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진흙으로 빚어 만들고 불을 준 신의 모습과 동시에 탐구에 대한 갈망, 금기를 넘어선 호기심, 그리고 이로 인한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한다. 영화는 또한 인간과 그들의 창조자 혹은 기원과의 관계를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낸 로봇을 집어 넣으면서 인간을 피조물인 동시에 창조자의 위치로 나타낸다. 여느 영화의 수동적인 로봇과는 달리 ‘데이빗’은 어느 정도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데, 로봇인 그가 인간들이 그토록 궁금해하던 자신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역으로 던졌을 때 돌아오는 인간의 답은 잔인할 정도로 무심하다. 이 때 그간 (다른 영화나 텍스트를 통해 보여졌던) 인간의 우쭐거림보다는, 자신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는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불안과 공허가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느낌이다. 어쩌면 인간의 기원 역시 그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많은 것에 답을 구하고 설명을 추가하며 복잡함을 단순함으로 혹은 더욱 복잡하게 풀어가던 사람들에게 극도의 단순함으로 말문이 막히게 한다. 이 영화가 좀 더 단순한 SF 액션 영화였다면, 고도로 발전된 미래 사회나 우주에서의 전투 장면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영화의 비주얼은 필요한 정도의 세심함을 기울이면서도 절제되어있다. <에이리언>의 징그러운 액션들을 예상한 나의 기대를 뒤엎고 도리어 묵직한 질문들을 던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재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러한 질문들을 영화로 끌어낸 감독과 제작진에 경외감마저 든다. 인간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엘리자베스가 이제 와서 인간을 왜 파괴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또 다시 우주선에 오르는 것을 보며 인간이 품고 사는 호기심이라는 독 혹은 약에 괜히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게 된다. *** 제목: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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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X-Men: First Class, 2011)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X-Men: First Class, 2011) – 프리퀄 이상의 프리퀄 http://flyingneko.egloos.com/3666463 마블 코믹스는 어렵다. 어렵다기보다는 복잡하다. 내가 태어나기 전, 아니 부모님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시작된 마블 코믹스의 캐릭터들은 같은 편에 섰다가도 어떤 작품에서는 다른 편에 서 있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살아나기도 한다. 마블 코믹스를 책으로 본 적은 없지만 영화로는 <헐크>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을 영화관에서 관람했다. 그럼에도 아주 최근까지 ‘마블 유니버스’로 이어진 그들을 봤다기보다는 개별 히어로로서 좋아한 편이다. 이 중에서도 <엑스맨> 시리즈는 한 명의 히어로를 조명한 시리즈가 아닌 여러 히어로 혹은 돌연변이(뮤턴트)들이 등장하고 이들세계 내외적 갈등을 다루어서 그런지 스핀 오프가 제작된 ‘울버린’이나 간달프로 기억되던 ‘매그니토’, ‘프로페서 X’ 이외의 캐릭터들은 그리 인상 깊게 남지 않았다.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 역시 처음에는 <엑스맨> 시리즈의 연장선이 아닌, <토르>에 이은 (최근 분발하고 있는) 마블의 새로운 히어로물 정도로 생각하고 봤다. 그러나 이번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는 선악 구도가 명확한 악에 맞선 히어로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뮤턴트(돌연변이)들의 성장기와 이후 시리즈로 이어지는 여러 이야기들의 시발점들을 모아놓은 작품이라고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수 만년을 거쳐 천천히 진화하고 있던 인류에게 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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