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서스크린의 기록영화

데이브 미로 만들다 (Dave Made A Maze, 2017)

데이브 미로 만들다 (Dave Made A Maze, 2017)
– 박스를 우습게 보지 말 것

여행에서 돌아온 애니는 문을 여는 순간 입을 다물지 못한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인 박스가 얼기설기 붙어있고, 친절하게 ‘입구’라는 간판도 매달아 두었다. 격양된 목소리로 남자친구 데이브를 찾는다. 당장 밖으로 나오라는 말에 박스 안에서 길을 잃었다는 대답이 울려온다. 잠깐, 사람 몇이 걸어 다닐 크기의 거실을 메운 박스 안에서 길을 잃다니, 어디 가당하기나 한 이야기인가.

출처: 공식 홈페이지(http://davemadeamaze.com/)

이 가당치 않은 이야기는 영화 <데이브 미로 만들다(Dave Made A Maze)> 속에서 더 가당치 않게 흘러간다. 호기심 반 장난 반인 키 큰 어른들이 줄이어 박스 속으로 들어간다. 위태위태해 보였던 박스가 무너지기는 커녕 너무도 자연스럽게 새로운 공간이 펼쳐진다. 나선형, 사선 무늬, 피아노 등 다채로운 주제와 무늬의 방이 복잡한 연결된 공간은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미궁이다.

길 잃은 데이브를 찾기 위해 농담처럼 떠난 박스 속 탐험은 어느새 목숨을 건 모험이 된다. 부비트랩을 밟고 목이 잘리거나 내장이 뜯기는 것도 모자라, 그리스 신화의 거대한 괴물 미노타우로스는 미궁을 헤매는 이들을 쫓는다. 데이브가 합류한 일행은 멈추지 않는 미궁의 확장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힘을 모은다.

흔하디 흔한 종이박스에서 시작된 상상은 내밀한 개인의 기억을 불러들인다. 키가 큰 박스 안을 이리저리 오가고, 아버지가 커터 칼로 내어준 문으로 들어가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던 까마득한 순간이 고개를 내민다. 자신에서 친구로 마음과 행동이 커져가는 고든, 타인의 시선과 평가, 부정적인 감정에 가린 관계의 본질을 찾아가는 애니와 데이브에 일상과 나의 이야기가 투영된다. 테이프와 끈으로 느슨하게 붙은 데이브의 박스들처럼 현재와 과거, 이곳과 저곳을 오가는 각자의 성긴 기억과 경험이 하나 둘 연결된다.

종이로 표현된 독특한 질감의 모험은 이러한 개인적 순간과 영화적 경험을 유쾌하게 결합한다. 어두컴컴한 미궁이 아닌 밝은 갈색 박스 속에서 피와 땀이 엉겨 붙은 끈적한 액체 대신 형형색색의 색종이가 흩날린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인데 심각해지기는 커녕 친구들과 삼삼오오 파티에 온 듯한 들뜬 기분에 휩싸인다.

출처: 공식 홈페이지(http://davemadeamaze.com/)

차원과 공간을 넘나드는 추격전은 화려한 그래픽이나 기하학적인 무늬로 표현되던 차원 이동에 대한 통념을 깨며 웃음을 선사한다. 원근법과 착시로 장면에 위트를 가미하고, 고든의 행동 변화에 따른 티셔츠 3단 변화 등 디테일에 숨겨진 보물은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첫 연출작다운 신선함과 첫 연출작 같지 않은 노련함이 주는 모순된 즐거움은 이 모든 게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인 양 연기한 배우들로 정점에 다다른다.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 무언가 맞닥뜨릴 것 같은 두려움,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이 만들어낸 데이브의 미로는 스크린 밖 일상과 닮았다. 우리 모두 각자의 미로를 만들고 헤매고 헤쳐 나간다. 피아노 건반 사이에 고개를 삐죽 내미는 엉뚱한 생각에 유쾌해지기도 하지만, 가끔은 미노타우로스보다도 무서운 스스로의 어둠에 쫓고 쫓긴다.

출처: 공식 홈페이지(http://davemadeamaze.com/)

영화 <데이브 미로 만들다>는 모든 게 마음 먹기에 달렸다는, 자명하지만 잊기 쉬운 명제를 환기한다. 인생이란 생각하기에 따라 어둡고 축축한 동굴을 헤매는 고달픈 과정일 수도 있고, 색종이와 종이학이 날아다니는 박스 속 모험이 될 수도 있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섞인 복잡하고 입체적인 시간 자체를 무(無)로 만들 수는 없지만, 어떤 시간의 단면에 초점을 맞추는지는 우리 마음의 몫이다.

생기자 버릴 고민부터 했던 종이박스에 조금 미안해진다. 어떤 이에게 ‘고작’ 박스였을 소재에서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따뜻하고 위트 넘치게 그린 감독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낸다. 일상에서 시작된 상상이 일상을 확장하고 또 다른 상상으로 이어지는 영화적 경험은, 언제나 대환영이다.

***

  • 제목: 데이브 미로 만들다 (Dave Made a Maze, 2017)
  • 연출: 빌 워터슨 (Bill WATTERSON)
  • 각본: 스티븐 시어스(Steven Sears, 원안, 각본), 빌 워터슨 (Bill WATTERSON)
  • 출연: 커스틴 뱅스니스 (Kirsten Vangsness, 제인), 스테파니 엘린 (Stephanie Allynne, 브린), 존 헤니건 (John Hennigan, 미노타우로스), 애덤 부시 (Adam Busch, 고든), 닉 순(Nick Thune, 데이브), 미라 쿰바리 (Meera Rohit Kumbhani, 애니)
  • 제작국가: 미국
  • 촬영: 에릭 애드킨 (Eric Adk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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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이버 영화

+ 스크린 밖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닮아 있었다. 누구나 한번쯤 있을 법한 박스의 추억을 떠올렸으면 좋겠다며, 감독과의 대화가 끝나고도 한참동안 관객들의 줄이 끝날 때까지 대화하고 사인을 건네며 사진 촬영에 경쾌하게 임하던 모습이 따뜻하고 좋았다. 앞으로도 호기심 넘치는 눈으로 신선한 즐거움을 가득 담아 내길!

통역사와 감독 간의 케미가 이렇게 중요했다니!

+ 영화 속 애니메이션은 BIFAN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공식 트레일러를 만든 김강민 감독이 작업했다. 여러모로 부천을 위한 영화!

+ 올해 부천에서 (아주 우연히) <크리미널 마인드> 출신 배우가 나오는 영화를 둘이나 봤다 . 오랜만에 보는 페넬로페 역의 커스틴 뱅스니스이 반가웠던 건 덤.

출처: 공식 홈페이지(http://davemadeamaze.com/)

**별점을 주자면: 8.5/10 (스토리:8, 비주얼:8, 연출:9, 연기: 9)


– 본문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공식 홈페이지, 자체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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