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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쓰기 (2019, 김훈)

김훈 <연필로 쓰기> (2019)
– 나의 서툰 감상과 다짐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 여러 해 전이었다. 잠깐 아래층을 다녀오려 탄 엘리베이터에 무뚝뚝한 얼굴이 하나 들어섰다.

‘……아!’

나는 그의 얼굴을 알지만, 그는 나를 알지 못한다. 그는 빌딩 엘리베이터의 복잡한 질서에 목적지에 한 번에 닿지 못하고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고층을 수 초 이내 돌파해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와 한 공간에 존재할 수 있는 시간은 겨우 몇 초였다. 그의 목적지에서 열리는 문에 다급하게 용기를 냈다.

“작…작가님 팬입니다!”

그가 뒤를 돌아봤는지, 어떤 표정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기뻤다. 책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 드문 일이 되어버린 그 때도, 지금도 공감 받기 어려운 글 쓰는 어떤 이와의 우연한 조우였지만 내 마음에 일었던 그 설렘은 여전하다.

종사관과 당번 군관을 물리치고 나는 혼자서 갔다. 낡은 소금 창고들이 노을에 잠겨 있었다. 나는 소금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마니 위에 엎드려 나는 겨우 숨죽여 울었다. 적들은 오지 않았다. – 김훈,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2010년, 152쪽, 젖냄새.

이순신의 이야기를 풀어낸 <칼의 노래>이 처음이었다. 감정을 우겨넣지 않은, 문장 사이의 치열한 여백에 매료되었다. 그 중에서도, 마침표마다 아들을 잃은 사무치는 슬픔이 함축되어 있는 문장을 한참 먹먹하게 바라보았다.

1948년에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군부 독재를 거쳐 지금에 이르는 대한민국을 살아냈고, 살고 있다. 그 기억과 경험은 그의 산문집 <연필로 쓰기> 곳곳에 배어 있다. 이상과 추상보다는 현실과 실질에 주목한 글은 정제된 단어와 담담한 문체 속에서 더욱 빛이 난다.

그에게 남북은 정치와 이념 갈등의 장이 아닌,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이다. 2018년 10월, 비무장지대 내 화살머리고지에서 수습된 육군 이등중사 박재권의 유해와 유품을 두고 그는 자신의 군생활과 수통을 떠올린다. 2010년 연평도 포격에 살기 위해 훈장을 불태운다거나 김장을 마치지 못한 채 피난을 갔다 돌아온 삶을 기록한다. 가라앉은 세월호 이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취재한 담담한 글 사이사이에는 표현되지 않은 비통함이 서려 있다.

그는 뒤늦게 한글을 깨친 할매들의 글, 호수공원의 노인들과 개의 배설물, 해안부대의 한 생활관 ‘토의록’, 길가에서 공을 차는 아이들과 키스하는 젊은이들에게서 생(生)의 뜨거움을 끄집어낸다. 그의 글은 구석기부터 현대를, 동서남북을, 일상과 사회를, 비극과 희극을 오가며 종횡무진으로 누빈다.

울다 웃다하며 책장을 덮는다. 이제라도 세상에 눈을 뜨고, 그 속을 걸어가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언젠가는 그처럼 담담하게 현실을 마주하며 그 속에 사람이 흐르는 글과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다. 그의 글에 더하는 나의 이 서툰 감상은 온몸을 다해 써 내려간 그와 글에 대한 경외와 그로부터의 영감, 그리고 나의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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