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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쓸모 (2019, 최태성)

역사의 쓸모 (2019, 최태성)
– 쓸모가 있을지 아닐지 누가 아는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유(遺)’는 남긴 것이기도 하고 버려진 것이기도 하다. 괴이한 것을 적지 않고(군자불어 괴력난신(君子不語怪力亂神)), 있는 것을 적되 새로운 것을 지어내지 않는다(술이부작(述而不作))는 원칙 하에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쓴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취하지 않은 설화, 소문, 민담, 전설 등을 담았다. 현존하는 책 중에서는 단군 신화를 수록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책이다.

왕의 지원으로 편찬된 <삼국유사>의 관점에서 ‘쓸모 없다’는 취급 받은 이야기들은 우리 민족의 근간을 이루고 영감이 되기도 했다. 예컨대 단군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이념적 지주로 널리 활용되었고, 개천절은 환웅이 천신 환인의 뜻을 받아 처음으로 하늘의 문을 열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대업을 시작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고조선의 건국정신인 ‘홍익인간’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거쳐 대한민국으로 계승되었고, 역사적인 규모나 사건을 강조할 때 ‘단군 이래’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누군가 ‘쓸모’ 혹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역사가 재조명을 받고 의미를 가지게 되는 일이 단군 뿐일까.

정도전이 이성계와 손을 잡고 조선을 건국한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던 신진사대부임에도 미움을 받아 10여년 간 떠돌이 생활을 해야 했거나, 후학 양성을 위해 세운 학교마저 몇 번 무너지고 쫓겨났다는 이야기는 잘 알지 못한다. 주장을 굽히지 않은 그의 성격도 원인이었지만, 그보다는 노비의 피가 섞인 출신의 영향이 컸다. 그래서 그는 고려인이지만 원나라에 항복했다가 다시 귀순한 이성계의 집안 내력과 인물을 살펴 뜻을 도모한다.

책 <역사의 쓸모>는 필요에 의해 외웠다 잊혀진 역사의 상기가 아닌, 역사를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22개의 주제마다 삼국,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근현대를 오가며 익숙한 이름 뒤에 교과서로 접하기 힘들었던 일화들이 소개된다. 나아가 그 때 그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 개개인의 삶, 우리가 발붙이고 선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는 방향을 제시한다.

거듭된 실패와 곤경에도 사회를 탓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비탄하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추진한 정도전의 삶은 어려움에 부딪힌 이들에게 주저앉기보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찾도록 격려한다. 폐허에서 지금에 이르는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태극기를 흔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사정을 헤아리는 단초를 제공한다. 고려시대의 협상과 외교 사례로 사드 배치와 일본 수산물 금지 조치를 둘러싼 분쟁에 적절한 외교적 접근을 역사적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다. 

조선 시대 현종 재위 시절 내내 상복을 몇 년 입느냐로 다퉜다. 당시 정치인들이 목숨을 걸고 달려들었던 이 문제가 그 정도의 무게를 가지는 지를 질문하며, 도처에 널린 갈등 요인에 우리는 과연 적절한 온도로 대응하고 있는지를 묻는다. 어우동과 나혜석의 일화로 ‘미투 운동’이나 성평등을 바라보는 불편한 시각 저변에 자리잡은 가부장적인 사고와 불평등을 꼬집는다. 책을 읽는 내내 과거에 머물던 개별의 역사는 현재와 연결되며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많은 이들이 대체로 학교에서, 필요에 의해 역사를 접한다. 그래서 맥락과 의미를 파악하기보다 숫자와 이름의 나열 위주의 역사를 어떻게 하면 빠르고 정확하게 필요한 만큼을 외울 수 있을지에 관심을 가진다. 역대 왕들의 이름 앞글자만 딴 노래를 만들어 부를지언정, 누군가가 일괄적으로 정리한 해석에 기반한 교과서 혹은 역사서의 시선을 의심하고 질문하는 일은 드물다. 이렇게 접한 역사는 많은 이들에 암기로 점철된 지루한 과목으로 머릿속에 잠시 존재했다 사라진다.

운 좋게 학창 시절 두 선생님을 만났다. 당시 몇 줄 언급으로 그친 발해사를, 그래서 수험과는 무관하지만 그 의미와 상황을 심도 있게 설명해주신 역사 선생님과 중국 왕조의 흐름에서 우리의 역사를 보는 법을 알려주신 사회 선생님이 그 분들이다. 덕분에 교과서에 서술된 방식 외에도 역사를 바라볼 수도 있다는 걸 접했다. 신선한 경험이었다. 관계와 맥락 속의 역사는 사실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이야기가 된다. 소질 없는 암기였지만 맥락 속에서 외운 사실들은 주변 관계를 파악하는 이정표가 되었다.

<역사의 쓸모>는 사람의 이야기를 이정표 삼아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고 미래를 향하는 우리에게 단서를 찾는 방법을 보여준다. 결국 역사란 사람이 만들어 온 것으로, 역사를 공부한다는 건 많고 적게 나와 주변의 모습이 투영된 역사 속 사람과 사건을 이해하는 일이며, 역사와 나의 관계와 맥락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한다. 과거의 무덤에서 무의미하게 존재했던 숫자와 이름들은 현재로 편입되어 생명을 얻고 귀감이 된다. 무엇보다 이렇게 마주한 역사는 재미있다.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History is 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Carr) .

그러니 역사를 대하는 우리의, 나의 자세는 조금 더 능동적일 필요가 있겠다.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던 E.H. 카의 이야기 속 역사가가 직업으로서의 역사가에 국한되지 않는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역사를 마주한, 그리고 각자의 역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역사가이며, 역사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행동해나가는 주체라고 나는 믿는다.

저물어가는 조선에 그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저 아무개다.
그 아무개들 모두의 이름이,
의병이다.
원컨대 조선이 훗날까지 살아남아 유구히 흐른다면,
역사에 그 이름 한 줄이면 된다.

책의 서두에 인용된 <미스터 션샤인>의 포스터 문구를 읽으며 그 누구 하나 쓸모 없는 삶, 역사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을지 자문해본다. 한편으로는 쉽게 읽히는 문장 사이로 잠깐이나마 오늘과 지금의 우리에 이르게 한 숱한 아무개들의 역사를 생각하고 겸허해진다. 나라는 아무개의 역사가 어떤 의미로 지금과 나중에 영향을 줄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면, 스마트폰으로 가십을 곧잘 소비하면서도 ‘왜’라는 질문과 의심을 보류한 채 현 시대의 과제로부터 도망 다니는 비겁으로부터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부쩍 드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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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역사의 쓸모
지은이: 최태성
출판: 다산초당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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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인터넷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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