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트 로커 (The Hurt Locker, 2008)
허트 로커(The Hurt Locker, 2008)
– 현실 도피와 중독
감독: 캐서린 비글로우(Kathryn Bigelow)
출연: 제레미 레너(Staff Sergeant 윌리엄 제임스), 안소니 맥키(Sergeant JT 샌본), 브라이언 게러티 (오웬 엘드리지)
장르: 전쟁, 액션, 드라마, 스릴러
제작국가: 미국
원작: Mark Boal
올해 들어서만 세 편의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본 것 같다. 출연 배우와 감독 때문에 끌려서 보게 된 [그린존]과 [브라더스]와는 다르게, [허트 로커]는 아카데미 시상식이 아니었다면 보기는 커녕 알지도 못했을 영화이다.
허트 로커(Hurt Locker)의 의미
영화 [허트 로커]와 관련된 자료나 홈페이지를 보면, ‘hurt locker’는 극심한 상처에 대한 미군의 속어 정도라고 설명을 해두었다. 그러나 이 영화의 원작자는 이를 두고 ‘있고 싶지 않은 곳’이라는 조금 모호한 정의를 내린다.
“If a bomb goes off, you’re going to be in the hurt locker. That’s how they used it in Baghdad,” Mark Boal told the New Yorker. “It means slightly different things to different people, but all the definitions point to the same idea. It’s somewhere you don’t want to be.” – Mark Boal
[출처] What is a ‘hurt locker’? , BBC
실제 미군에 복무 중인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그냥 그런 뜻이 아닌가의 짐작 뿐 명확한 정의를 내려주지 못했다.
뜻이 어떻든 간에 이러한 모호한 제목을 통해 영화는 어떻게도 있기 싫은 불편한 곳 혹은 극심한 상처를 주는 그런 곳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는 걸 암시했다.
영화의 줄거리와 영상, 사운드
전쟁 영화라 그런지, 요즘 전쟁 영화의 유행인지는 모르겠지만, Hands-held 기법으로 상당히 화면이 많이 흔들린다. 그러나 영화를 처음 볼 때는 화면이 흔들리는 지도 모를 만큼 몰입해서 보는 데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폭발물을 처리하는 EOD에 제임스가 부임하게 되고, 그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팀원들이 혼란에 빠지게 되는 등 본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의 이야기이다. 기-승-전-결의 구조로 관객들에게 적절한 긴장을 준다기 보다는 여러 편의 에피소드로 나누어져 진행되면서도 결국 첫 화면의 메시지와 마지막 장면이 묶이는 오묘한 구조로 보는 이로 하여금 어느 시점에서 긴장을 해야 할지 예측하기 어렵게 만드는 면도 있다.
사실 전쟁을 소재로 하고는 있지만, 전쟁의 정치적인 면에 대해 이야기한 [그린존]이나 전쟁이 한 가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그린 [브라더스]는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줄거리가 잘 어우러져 한 편의 잘짜인 드라마를 보는 느낌이었다면, [허트 로커]는 전쟁에서 살아남는 법에 대해, 그리고 그 과정을 적어 놓은 생존 일지 같은 느낌이었다.
영화의 사운드나 영상도 상당히 인상적이다. 사실감을 살리기 위해 분쟁 지역인 요르단에서 촬영을 감행한 점이나, CG를 쓰지 않은 폭발 장면과 엄청난 사운드는 마치 스스로가 폭발이 일어나는 곳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대사 없이 클로즈업 샷을 통해 눈동자의 움직임을 보여주거나 방호복 안의 시선과 숨소리 등을 통해 인물들의 심리 상태를 대사 몇 마디 보다 더 사실적으로 표현한 점과 특별한 음악 없이 중반까지 음향 효과로 긴장감을 조성해나가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영화의 메시지 – 현실 도피와 중독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앞서 언급한 영화적 요소보다는 영화의 메시지가 가장 강렬했다.
전투의 격렬함은 마약과 같아서 종종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중독된다.
The rush of battle is often a potent and lethal addiction, for war is a drug.
– 크리스 헷지스 (Chris Hedges)
영화의 첫 장면에 스치듯 등장하는 메시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잊고 있다가 마지막 장면에서 머리를 울리며 다시금 기억났다.
제임스 전임 팀장이었던 톰슨의 극히 신중한 태도와는 다르게 제임스가 폭발물을 대하는 태도는 매 순간 인생을 담보로한 도박을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전쟁이라는 게임에 중독되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간다.
이러한 전쟁 중독은 제임스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종군 기자였던 Chris Hedges 역시 전쟁으로 돌아가는 자신의 ‘습관'(Habit)이 결국 자신을 죽이고 있다고 생각해 이러한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다며, 2~3년간의 우울증과 현실부적응, 심리적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에 시달렸다고 한다. [브라더스]의 샘 역시 이러한 과정의 초기 단계를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참고: Addicted to War: A Conversation with Chris Hedges, Peace Magazine
제임스에게 있어 전쟁 밖 현실은 고통이다. 순간순간 목숨을 걸고 뛰어들며 느끼는 아드레날린의 분출과 혼돈 속에서도 자신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 폭탄이 제거되었을 때의 쾌감은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 사라진다. 살고 죽는 문제가 아니라 고작 시리얼 하나를 고르는 것 뿐인데 무수한 선택지를 앞에 둔 그의 표정은 그 누구보다 무기력해 보인다.
그는 갓난 아기인 아들을 두고 어릴 때는 모든 것이 좋지만 크면 클 수록 좋아했던 모든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 한 두 가지 정도 밖에 남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굳힌다. 그리고 전쟁터로 돌아간 그의 표정은 삶을 둔 승부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다.
전쟁 중독도 무엇을 판돈으로 거느냐가 다르지만 궁극적으로는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언가에 중독된다는 의미에서 마약이나 도박 중독과 비슷한 것 같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이 아니더라도 작든 크든 누구든 선택과 책임의 강요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단을 찾고 있지 않은가.
나 역시 누구와도 어떤 말도 하기 싫어서 입을 꾹 다물고 피곤에 뿌옇게 보이는 눈을 비벼가며 찾은 영화관에서 단절된 편안함을 느꼈고, 어쩌면 그와 내가 무엇인가에 중독되어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처지가 아닐까 생각했다.
어딘가에서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중독의 대상보다 행복한 무언가를 쥐어주어야 한다고 한 글을 본 적이 있다.미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전쟁이라는 카드를 뽑아 든 제임스를 단순히 전쟁을 즐기는 괴짜 정도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다만, 게임이나 도박과 같이 개인적인 부분이 큰 중독과는 다르게, 개인 이상의 많은 사람의 목숨이 달린 전쟁이기에 문제가 더 복잡하고 심각해지는 것 같다. 그에게 어떠한 행복을 주어야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을 지의 고민은 우리 모두의 과제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보이지는 않지만, 극심한 정신적 상처로 자신을 몰아세우면서, 그 상처를 통해 살아있음의 쾌감을 느끼는 제임스에게 [허트 로커]는 바그다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 아닐까.
[허트 로커]를 통해 전쟁이 개인에게 미치는 또 하나의 면을 보게 되어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쟁뿐만이 아니라 현실 도피와 중독 등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던 것 같다.
+. 개봉일에 맞춰 보고도 근 한달 동안 충격으로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았던, 기억에 남을 영화
본문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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