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의 기록영화

우먼 인 블랙 (The Woman In Black, 2012)

우먼 인 블랙 (The Woman In Black, 2012)
– 죽음의 순환 속 절제된 공포와 긴장감

사람은 무엇에 공포를 느낄까? 공포 영화의 수만큼이나 관객들에게 공포를 ‘선사’하는 방법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스크림(Scream)>이나 <나는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I Know What You Did Last Summer, 1997)>와 같이 적당히 숨어있다 놀래 키고 피를 튀기기도 하고,  <링(リング: The Ring)>과 같이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으면서 천천히 기어
나와 사람을 옥죄기도 한다. 감정이나 색감이 전반적으로 건조하면서도 기괴한 컨셉, 소리와 화면으로 충격을 주는 일본의 몇몇 공포 영화와는 달리, 조금 더 감정적이고 질척한 분위기의 우리 식 공포도 있고, 이런 분위기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맛의 동남아 공포 영화도 있다. 헐리우드에서 아시아 공포물을 리메이크하거나 비슷한 소재로 만들 때는 정서적 코드가 달라서 그런지 그냥 끔찍하기만 할 때도 있었다. 서로 다른 코드를 잘만 활용하면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을 텐데,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우먼 인 블랙(The Woman In Black, 2012)>는 그런 면에서 꽤 신선한 공포 영화였다. 미국이 아닌 영국적인 색채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는 음울한 색채와 감정 사이에서 피를 섞지 않고도 영리하게 긴장감을 조성한다. 보일 듯 말 듯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쏟아지는 물, 쿵쿵대며 앞뒤로 과격하게 움직이는 흔들 의자에서 갑자기 보이는 얼굴, 움직이지 않는 인형들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공포감. 화려한 시청각 장치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들었다 놨다 하는 공포를 기대했다면 지루할 수도 있겠다. 은근한 무언가,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인물 뒤로 보이는 희미한 검은 그림자의 갑작스러운 출현과 사라짐은 보는 이로 하여금 내가 지금 무언가를 본 것인지 아닌지 조차 헷갈리게 한다.  또 한번 나타나 정체를 드러내기를 기다리면서, 동시에 그 무언가를 확인하였을 때의 공포의 예측으로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상충하며 긴장감이 생긴다.


아내를 잃은 후 그녀의 환영에 시달리며 직장 생활에서도 위기에 몰린 주인공 아서는 일 마시 하우스의 처분과 관련하여 집 안에 남아있는 최종 문서들을 모조리 검토해 법적으로 처리하는 데 문제가 없도록 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바닷가 근처의 습지에 세워진 이 일 마시 하우스는 썰물 때는 길이 열렸다가 밀물에는 완전히 고립된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그와 말조차 섞으려고 하지 않고, 일 마시 하우스에 대한 질문에 적개심이 가득 찬 눈빛으로 응답한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업적 사명감과 일종의 오기 같은 것으로 그 곳으로 발걸음을 하는 데, 오가는 길과 저택 여기저기서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을 보게 되고 마을에서는 아이들이 죽어간다. 검은 옷의 여인에 대한 궁금증과 죽음의 연쇄 고리를 끊고자 아서는 늪에 빠진 결국 원한의 근원을 건져낸다. 이는 흡사 <링>에서 우물 속에서 부패한 사다코의 시신을 꺼내는 장면을 보는 듯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계속된다는 것 역시 <링>의 그것과 비슷하다.

검은 옷 여인은 대체 왜, 라는 질문은 세상이 그냥 미운 건지 도통 답이 안 나오는 사다코와 링의 저주에 비해 여러 가지 유추해볼 수 있다 (링의 경우도 책을 읽다 보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주의 시작은 알아도 왜 계속되는 건지는 사실 잘 모르겠더라). 제닛 험프리로 추정되는 검은 옷을 입은 여인은 미혼모로 자신의 아이를 언니에게 반강제로 입양시키는 데, 불의의 사고로 아이를 잃자 자신도 목을 매달아 자살하고 이후로 마을의 아이들을 하나 둘 데려가기 시작한다. 이 아이들은 사후세계에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검은 옷 여인과 떠돈다. 자살 전 남긴, “너는 그를 구할 수도 있었다 (You could have saved him)”이라는 말에서 짐작해보건대, 그녀는 다른 아이들이 탐나서 라기 보다, 그들을 구하지 않은 어른들을 원망하고 괴로움에 빠뜨린다고 보는 게 보다 적절하다. 구원받지 못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어른들 역시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는 우울함 속에서 생활한다. 어디 빠지거나 치거나 하지 않도록 아이들을 가두어 놓아도 검은 옷 여인은 홍길동 마냥 여기저기 나타나 아이들을 데려간다.

<링>과는 달리 주인공 아서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나 검은 옷 여인과 대조를 이루는 하얀 옷 여인, 즉 죽은 자신의 아내와 아이의 손을 잡고 사후 세계를 향해 걸어간다. 남들은 하지 않았으나 자신만 했던 것, 아이의 죽음을 방관하지 않고 구하기 위해 행동한 것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지만, 결국은 구원의 길로 이끌었을 것이다.


원한과 죽음의 순환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발표 당시부터 유럽에서 뜨거운 호응을 얻었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고, 이작품은 1987년 연극으로 각색되어 초연된 후 계속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한다. 소설과는 결말부터 설정까지 많은 부분이 다름에도 비슷한 느낌이 든다. 다만, 글로 조성할 수 있는 긴장감이 시공간의 제약이 있는 화면으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좀더 극적인 요소를 추가한 부분도 있다. 소설에서는 눈 앞에서 아내와 아들을 잃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데 비해, 영화는 죽음과 구원이라는 비교적 명확한 결말을 내어주는 편이다.

절제된 공포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법한 이 영화는 <이든 레이크(Eden Lake,2008)>를 연출한 제임스 왓킨스의 두 번째 연출작이다. 공포와 스릴러를 한창 즐겨보던 무렵에 접한 <이든 레이크>는 지금까지 본 영화 중 불편하기 그지 없어 결말을 도저히 보지 못하고 꺼버린 유일한 영화인데, 아직 두 번째 연출작이라 어떤 색을 지닌 감독이라고 이야기하기는 이른 것 같다 (다양한 시도로 공포 영화에 한 획을 그어주길!). 공포 영화에 계절이 어디 있냐고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추운 2월 말의 날씨에 더욱 몸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이 영화가 여름 즈음에 개봉했다면 더 괜찮은 반응을 얻었을 지도 모르겠다.

***

제목: 우먼 인 블랙(The Woman In Black, 2012)
연출: 제임스 왓킨스(James Watkins)
각본: 제인 골드만(Jane Goldman) / 원작: 수잔 힐(Susan Hill)
출연: 다니엘 래드클리프(Daniel Radcliffe, 아서 킵스), 시아란 힌즈(Ciaran Hinds, Mr. 데일리), 자넷 맥티어(Janet McTeer,데일리 부인)
장르: 드라마, 공포, 스릴러
제작국가: 영국
촬영: Tim Maurice-Jones
음악: Marco Beltra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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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다 보니 앞으로 ‘공포 영화를 그리 많이 보지 않는다’는 말은 못하겠다. 은근 영화관에 걸리는 작품은 다 챙겨보는 구나

+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해리포터> 시리즈 이후 이미지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중인 것 같은데, 아직 나이가 어려서 그런지 ‘아버지’의 역할에 맞는 감정의 깊이는 덜했다. 10년 정도 이후에 맡았으면 괜찮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 공포 영화를 못 보지만 반 강제로 끌려간 지인은 인상적인 오프닝 시퀀스를 그 이상으로 활용하지 못해 아쉽다고 표현. 이 자리를 빌려 감사.

<라이프로그>


우먼 인 블랙
다니엘 래드클리프,시아란 힌즈 ,자넷 맥티어 / 제임스 왓킨스
나의 점수 :
★★★★☆ 헐리우드 공포물과는 또 다른 신선하고 절제된 공포. 죽음(저주)의 순환이라는 소재로 <링>과 의도치 않게 비교가 되는데, 결론적으로는 꽤 괜찮았다. 여름에, 적어도 춥지 않을때 개봉했으면 더 주목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글/ 나는고양이 (http://flyingneko.egloos.com)

 

본문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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