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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부아르 (Au revoir là-haut, 2013)

오르부아르 (Au revoir là-haut, 2013)
– 부당한 사회를 향한 유쾌한 사기극

배경은 제1차 세계대전과 그 직후. 시작된 지 2개월 만에 독일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 ‘전쟁’보다는 ‘점령기’였던 제2차 세계대전과 달리, 제1차 세계대전은 50개월 동안 전 유럽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수많은 이들이 전쟁 중에 죽었다. 전쟁 후 살아 돌아온 이들은 환영 받지 못하고, 변변한 일거리 없이 폐허가 된 길거리를 전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국가의 부름에 목숨을 걸고 응했던 상이군인, 즉 ‘깨진 얼굴’들은 죽은 이들에 대한 죄의식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부당함에 저항하지 않는다.

소설 <오르부아르>의 주인공 알베르는 전쟁 막바지에 죽음의 위기를 모면한다. 전우 에두아르는 그를 살린 대신 얼굴 절반이 포탄에 날아간다. 알베르는 이식 수술을 거부하며 인간의 형체라고 보기 힘든 얼굴을 고집하는 에두아르를 보호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하루살이 같은 이 ‘깨진 얼굴’들의 삶은 이내 한계를 드러내고, 에두아르는 전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추모’라는 기이한 유행과 대중의 슬픔을 이용한 사기극을 고안한다.

700 페이지에 달하는 책은 금새 읽혔다. 집중만 할 수 있었다면 하룻밤 새 읽었을지도. 전쟁 막바지부터 2년 여간은 그린 이 소설은 비극적인 시대적 배경에도 관찰과 내면 묘사를 오가는 작가의 내레이션 덕에 전반적으로 경쾌하다. 두 청년을 둘러싼 사건 사고와 페리쿠르 일가, 앙리 도네프라델 등 주변 인물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얽히고설키며 궁금증을 자아낸다.

국가와 사회의 요청에 충실하게 임한 이들의 손에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전쟁 직후는 지금과 묘하게 닮아 있다. 성실하게 일하고 착실하게 세금을 냈던 이들이 거리로 내몰린다. 평생을 바친 삶의 터전이 빼앗길 위기에 처하고 일자리마저 구하기 어렵다. 작가 피에르 르메트르는 이를 두고 ‘사회의 배반’이라 덧붙인다. 엄청난 실업난에 시달리고 있는 지금의 유럽에서 그간 사회가 요구한 대로 빚을 내 아파트를 사고 아이도 낳고 열심히 일한 50대에게 돌아 온 것은 집과 연금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 이러한 청천벽력에 배신감을 느낄 새도 없이 살기 위해 거리를 배회하고 허드렛일이라도 마다 않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다.

그래서인지 전후 유럽을 잠식한 ‘장례식’과 같은 분위기를 악용한 사기 행각에 분노하기보다 연민이 생긴다. 전쟁터에서 떨어진 곳에서 부를 축적해온 이들이 조금 더 가지려 아등바등하는 사이, 전장에서 싸우며 몸도 마음도 다친 이들은 전우의 죽음 앞에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함을 침묵해야 하는 사회. 불법 행위임에도 그들의 유쾌한 한 방을 응원하게 되는 것은 소설 안팎의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소심한 저항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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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르부아르 (Au revoir là-haut, 2013)
지은이: 피에르 르메트르(Pierre Lemaitre)
옮긴이: 임호경
출판: 열린책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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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기 전 <작가와의 만남>에 참여한 덕에 소설이 훨씬 재미있게 읽혔다. 영화를 보기 전 최소한의 정보만 알고 가듯 책도 백지 상태로 읽곤 했는데, 우리와는 다른 제1차 세계대전의 의미와 작가의 시각을 알고 읽으니 단순 사기극 이상의 색다른 재미가 느껴졌다.


+ 피에르 르메트르는 소설 속 화자처럼 실제로도 경쾌하고 열정적인 사람인 것 같았다. 55세에 데뷔한 그가 전한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의지를 가진다면 언제나, 누구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응원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 안 배운 것보다 더 기억나지 않은 제2외국어였던 프랑스어.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도였지만 프랑스인, 그것도 작가에게 건넬 수 있었다는 게 감개무량.


– 책 이미지 출처: 열린책들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해당 저작권자에 있습니다) / 그 외 이미지: 직접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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