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 죽이기 (To Kill a Mockingbird, 1960)
앵무새 죽이기 (To Kill a Mockingbird, 1960)
– 어른을 위한 희망의 드라마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좁고 기울어진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비참한 역사가 특히 분통했다. 균형 잡힌 역사관이 자리잡지 못한 당시, ‘일본’이 섞여있는 그 어떤 것에도 차별 없는 혐오를 드러냈다.
대학 입학을 앞둔 한가로운 생활의 끝자락, 우연히 접한 책 한 권은 나의 편협한 세계관을 흔들었다. 그 책은 바로 세노오 갓파의 자전적 소설 <소년 H>. 같은 시기 일본 열도에 살던 소년 H의 눈에 비친 서민들의 모습은 상상 이상으로 비참했다. 언제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지 모를 폭격에 떨고, 사람도 숟가락도 억울하게 빼앗겼다. 우리만이 피해자라는 편견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내 머릿속에는 충격과 혼란이 찾아왔다.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책장을 덮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 미국 앨라배마 주 작은 마을.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소녀 ‘스카웃’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흑인을 변호하는 아빠와 주변을 통해 편견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던 시대에 맞선 진정한 용기와 배려를 배워나간다는 내용이다.
어린 스카웃이 바라본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피부색이 달라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같은 교회에서 예배를 볼 수 없다. 어떤 가문의 아이들은 무식한 것이 당연하다. 알렉산드리아 고모는 늘 입던 멜빵바지를 입으면 ‘숙녀’가 되지 못한다며 호통친다. 레이먼드 아저씨는 흑인과 결혼해 혼혈아를 낳았다는 것 때문에 술에 취해 사는 척 자신을 감추고 낮춘다. 자신을 부당하게 놀리는 아이들에 주먹을 쥐었다가도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참아야 한다.
스카웃과 젬, 딜은 궁금증이 생길 때마다 주변의 어른들에게 달려간다. 그들의 곁에는 피부색 하나만으로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유얼과 같은 어른이 있는가 하면,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싸우는 진정한 용기를 몸소 실천하는 아빠 애티커스, 정의가 실현되는 그 때를 위해 조용히 자리를 지키는 헥 테이트 보안관, 법 앞에 정의와 양심에 대한 질문을 던진 배후의 테일러 판사, 땅에서 난 것이라면 모든 것을 사랑하는 모디 아줌마와 같은 어른들도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등장하는 ‘왜?’에도 어른들은 난색을 표하지 않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렇게 아이들은 어른들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또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나간다.
처음에는 애티커스와 어른들이 지나치게 이상적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대할 때 인내심 넘치는 행동을 차치하고라도, 불 보듯 뻔히 보이는 실패에도 그들은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역전의 드라마는 없었고, 희망이 익숙한 좌절로 이어져도 어색하지 않을 상황이었다.그럼에도, 애티커스는 스카웃에 다시금 희망을 속삭인다. 우리가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다고.
조금이라도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다면 헛된 희망이란 없다.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부딪히다 보면, 언젠가 돌아볼 지금보다 그 때가 조금 더 나아져있을 것이다. <앵무새 죽이기>가 전한 인간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은 소설 안팎, 소설이 출간된 그때와 세기가 바뀐 지금에도 유효하다.
우연히 삶으로 찾아온 책으로 다시금 생각과 마음을 흔들렸다. ‘나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라는 고질적인 불안은 책장을 덮은 후 조금씩 기대로 바뀐다. 여전히 흔들릴 수 있는 굳지 않은 머리와 읽고 보고 배울 것이 아직도 많은 지금에 조바심보다는 감사함을 느낀다.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의 증명은 <앵무새 죽이기>라는 책이 나에게 준 또다른 희망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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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앵무새 죽이기 (To Kill a Mockingbird, 1960)
지은이: 하퍼 리 (Harper Lee)
옮긴이: 김욱동
출판: 열린책들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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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속 어른들은 아이들의 질문에 심드렁한 대답을 주는 대신, 그들의 눈높이에서 차근차근 정의와 신념에 대해 설명해 나간다. 이러한 어른들은 대화와 행동을 통해 소설 밖 독자들에게도 희망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한다. 덕분에 어린 스카웃의 목소리를 빌리고 있음에도, 또래 소녀들을 화자로 한 몇몇 소설과는 다르게 어린 아이의 시선에 머무르지 않고 깊은 울림을 준다.
+ 제목에 얽힌 오해가 있었다.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스산한 목소리로 ‘앵무새 죽이기’라고 또박또박 읽었던 광고를 들었던 (조작됐을지도 모를) 기억을 탓하며 변명을 더해본다. 스릴러인 줄 알았는데, 스릴러만큼 빨리 책장이 넘어가는 드라마였다.
+ 피부색, 성별을 비롯한 각종 차별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그런 현실의 영향으로 한 사람 혹은 소수가 지금 당장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하나 둘 모이고 그들이 함께 목소리를 내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에 기대를 걸게 된다.
+ 최근에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한 책을 연달아 읽게 되었다. 차별이 극심했던 그 시절 사람들은 어떻게 참고 살 수 있었을까. 흠.
++ 하지만 이 나라에는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도록 창조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 앞에서라면 거지도 록펠러와 동등하고, 어리석은 바보도 아인슈타인과 동등하며, 무식한 사람도 어떤 대학 총장과 동등한 하나의 인간적인 제도가 있지요. 배심원 여러분, 그 제도가 바로 사법 제도입니다. 그것은 미국의 대법원일 수도 있고, 이 앨라배마 주에서 가장 말단의 치안 재판소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배심원 여러분이 지금 수고하고 계시는 이 법정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 법원은 인간의 다른 제도가 그러하듯 나름의 결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우리의 법원은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만들어 버리는 위대한 제도입니다. 우리의 법원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습니다.
저는 우리의 법원과 사법 제도를 확신하는 그런 이상주의자는 아닙니다. 저에게 그것은 이상이 아니라 살아서 꿈틀거리는 현실이지요. 배심원 여러분, 법정은 제 앞 배심원석에 앉아 계신 한 사람 한 사람이 건전해야만 건전할 수 있습니다. 법정은 오직 배심원단이 건전한 만큼 건전하고, 배심원단은 그 구성원이 건전한 만큼 건전합니다. 배심원 여러분이 지금까지 들으신 증거를 감정의 동요 없이 검토하여 판단을 내려 이 피고를 그의 가족에게 돌려보내시리라 확신합니다. 배심원 여러분께서 맡은 바 의무를 다해 주시기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비는 바입니다. – p. 380
– 본문 이미지 출처: 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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