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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 (2016)

안녕 주정뱅이 (2016)
– 몽롱하며 또렷하고, 먹먹하며 송연한 술담

술잔을 기울인다. 밤이 깊어 갈수록 이야기도 깊어진다. 술에 되려 정신이 또렷해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또박또박 끄집어낸 이야기는 말려가는 혀끝에서 공기와 진동을 타고 허공으로 흩어진다. 다음 날 끔찍한 두통과 갈증, 듬성듬성 몽롱한 기억으로 불안과 후회를 경험하고도 미련한 인간은 또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책 <안녕 주정뱅이>가 담은 일곱가지 이야기는 술잔의 기억만큼 몽롱하며 또렷하고, 먹먹하며 송연하다. 술로 느슨하게 연결된 사람과 사랑은 엇갈리고, 오해와 진실은 교차점을 찾지 못한 채 떠돈다. 죽음을 앞둔 남편을 두고 술을 마시는 아내, 죽은 동생의 연인과 술잔을 기울이는 누나, 자신이 만든 환상과 술담을 나누는 신예 작가, 우연한 재회의 밤을 기념하며 떠들썩하게 술을 마시는 세 친구…… 평범한 사람들의 술잔에 비친 일상적인 비극의 민낯을 몽롱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소소한 술담을 기대했다 무거운 마음으로 책장을 덮는다. 더러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 이야기의 처음을 뒤적였다. 쉽게 읽히지만 온전히 소화되지 않는 문장들을 파헤치는 대신 그 자리에 둔다. 가까운 술잔에 이토록 많은 이야기가, 아니 이보다 더 많은 탄식과 슬픔이 맺힐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인생이 던진 농담에 어찌할 바 모르는 우리 곁에서 술은 위로와 절망으로 마음을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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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안녕 주정뱅이
지은이: 권여선
출판: 창비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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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기 같은 건 고객님 부담이래.
훈도 웃었다.
모기 같은 건 우리 부담이래?
응, 우리 부담이래.
어쩌냐, 부담스러워서.
그러니까. 주란은 결코 모기 같은 건 부담하지 않으려고 할텐데.
그럼 우리 둘이 부담해야 하는데 큰일이네.
살다살다 모기 같은 걸 부담해야 하는 날이 오다니.
부담부담 하다보니 모기 같은 것도 제법 정겹게 느껴지지 않냐. – 삼인행. P. 56.

++ 어쩌면 기억이란 매번 말과 시간을 통과할 때마다 살금살금 움직이고 자리를 바꾸도록 구성되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 이모. P.106

++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도 없다. 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 -카메라. P. 136

++ “이를테면 과거라는 건 말입니다.”
마침내 경련이 잦아들지 그가 말했다.
“무서운 타자이고 이방인입니다. 과거는 말입니다, 어떻게 해도 수정이 안되는 끔찍한 오탈자, 씻을 수 없는 얼룩, 아무리 발버둥쳐도 제거할 수 없는 요지부동의 이물질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기억이 그렇게 엄청난 융통성을 발휘하도록 진화했는지 모릅니다. 부동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유동적이게 만들 수 있도록, 육중한 과거를 흔들바위처럼 이리저리 기우뚱기우뚱 흔들 수 있도록, 이것과 저것을 뒤섞거나 숨기거나 심지어 무화시킬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기억은 정확성과는 어긋난 방향으로, 그렇다고 완전한 부정확성은 아닌 방향으로 기괴하게 진화해온 것일 수 있어요.” – 역광. P. 168-169

 

– 본문 이미지 출처: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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