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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1980,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 고집스러운 느림, 아날로그적 낭만에 대한 ‘러브스토리’

무언가를 좋아하는 행위는 가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이어진다. 바라만 봐도 좋았던 대상의 일부 혹은 전부를 곁에 두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흐름은 사람을 향하기도, 물체를 향하기도 한다. 애정의 대상은 형태를 초월하며,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을 지닌 평범한 이들은 늘 애정과 집착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서있다.

폐지압축공 한탸는 책을 사랑한다. 종이로 이루어진 ‘책’이라는 형태를 넘어 그 안에 담긴 각양각색의 생각을 사랑한다. 한탸는 각종 폐품 사이에 섞여 들어온 책을 발견해 이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특별하게 장식된 꾸러미 속에 알맞은 자리를 마련한다. 삼십오 년간 한 달에 2톤의 책을 압축해온 한탸는 홀로 죽어가는 책의 곁은 지키지만 책이 남긴 유산들로 가득 찬 ‘시끄러운 고독’ 덕에 외로울 틈이 없다.

그의 애정은 지하실 문턱을 넘어 자신의 집으로 이어진다. 쉬이 보낼 수 없는 책들을 집으로 가져온 탓에 부엌, 창고, 화장실 선반 켜켜이 책이 쌓여 발 디딜 틈도, 고개를 마음대로 돌리지 못한다. 매일 침대 위로 쌓아 올린 2톤의 책에 짓눌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으로 의자 위에서 무릎을 세운 채 잠들면서도 자신의 쉴 곳마저 빈틈없이 채우는 기이한 행위는 반복된다.

쓰레기더미에 시선을 멈춰 아름다움을 찾고 또 이별을 고하던 한탸의 느리고 낭만적인 삶은 새로운 것들의 등장으로 혼란에 빠진다. 매일 반복되는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비인간적인 행위’ 속에서도, 전쟁이 지나가는 동안에도, 어두운 지하실 한 켠에서 지켜온 그의 고결한 애정은 절박한 집착이 된다. 거대한 기계와 우유와 콜라를 마시며 컨베이어 벨트 위를 지나가는 수많은 책에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젊은이들에 결국 한탸는 설 자리를 빼앗고 만다.

소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애정마저 쉽게 흘러가는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바치는, 느리고 불편하고 서툰 그 시절에 대한 짧은 비망록이자 향수다. 매일 새로운 것들에 시간과 기억이 밀려나며 남긴 허전함을 억지로 채우려고 하는 우리에게,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고집스럽게 낭만적이었던 한탸는 묻는다.

당신은 고독 속에서 맨몸으로 스스로를 마주할 수 있는가.
그리고 진심으로 삶을 사랑하고 있는가.

더 늦기 전에, 떠밀리듯 흘러가는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삶을 음미하며 사랑할 수 있는 낭만을 되찾을 수 있기를, 책장을 덮으며 나지막하게 읊조려 본다.

***

제목: 너무 시끄러운 고독 (Prilis Hlucna Samota, 1980)
지은이: 보후밀 흐라발 (Bohumil Hrabal)
옮긴이: 이창실
출판: 문학동네 (2016)

***


+ 책과 활자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와 닿는 예찬.

+ 틈틈이 심어 놓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위트를 찾는 재미도.

밑줄 긋기
++ 가치 있는 무언가가 담긴 책이라면 분서의 화염 속에서도 조용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진정한 책이라면 어김없이 자신을 넘어서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킬 것이다. (p. 11, 1장)

++ 내가 혼자인 건 오로지 생각들로 조밀하게 채워진 고독 속에 살기 위해서다. 어찌 보면 나는 영원과 무한을 추구하는 돈키호테다. 영원과 무한도 나 같은 사람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을 테지. (p. 19, 1장)

++ 내가 보는 세상만사는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으로 활기를 띤다. 일제히 전진하는가 싶다가도 느닷없이 후퇴한다. 대장간 풀무가 그렇고, 붉은색과 녹색 버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내 압축기가 그렇다. 만사는 절룩거리며 반대 방향으로 기울어지는데, 그 덕분에 세상은 절름발이 신세를 면하게 된다. (p. 69 5장)

++ 나는 이제 마음을 추스르고 유리벽 너머로 트럭들이 손때 묻지 않은 새 책들을 쏟아놓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 책들은 어느 누구의 눈이나 마음, 머리도 오염시키지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p. 90, 6장)

– 본문 이미지 출처: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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