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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2008, 텐도 아라타)

애도하는 사람 (2008, 텐도 아라타)
– 죽음과 맞닿은 매 순간의 삶

올해 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상을 치르고 명절이 지나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죽음은 소설 속 이야기 같다가, 예기치 못한 순간 현실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가 없는 ‘일상’이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가 어디에 있든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늘 곁에 계셨다. 그리고 나에게 하나뿐인 아버지라는 존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스스로를 위로해야 했다. 감성을 자극하면 무너질 것 같아 깊이 느끼고 생각해야 하는 건 무엇이든 피했다. 이성을 앞세우는 자기계발서나 딱딱한 교양서적을 집어 들었다. 시선을 돌리고 있다보면 시간이 흐르고 아픔이 덜해질 줄 알았다. 완벽한 착각이었다. 나의 우주가 무너졌는데, 몇 백 광년 떨어진 그 우주와 별의 이야기가, 효과적인 공부법 따위가 눈에 들어올리 없었다. 어느 날은 무심한 얼굴로 후라이팬에 계란을 깨뜨리곤 한참을 주저앉아 울었다. 지난 해 말 계란이 귀해졌다는 말에 ‘내 몫까지 두 개 먹으라’며 손수 후라이를 만들어주셨던 아버지가 생각났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그리움의 순간은 힘겹게 붙잡고 있던 나를 무자비하게 흔들었다.

누군가 죽음에 대해, 아니 죽음 후 남은 이들이 겪는 상실의 아픔을 이야기해주길 바랬다. 절박한 마음으로 찾은 책이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이다. 거창한 수식어를 뒤로하고, 슬플 애(哀), 슬플 도(悼), 슬픔과 죽음이 겹을 이룬 단어만으로도 읽어야할 이유는 충분했다.

<애도하는 사람>의 주인공 사카쓰키 시즈토는 일본 각지를 돌며 생전 일면식도 없었던 이들을 애도한다. 신문 귀퉁이에 한 줄, 혹은 그마저도 남기지 못한 죽음이 머문 장소로 찾아가 한 손은 하늘로, 한 손은 땅을 향했다 가슴에 모으며 그들을 기억하겠노라 기도하는 식이다.

정원에 살던 작은 새, 할머니, 소아병동의 아이들, 가까운 친구에 이르기까지 죽음을 가까이하며 그 속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시작되었을 애도의 길에는 숱한 오해가 따른다.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자격으로, 위선일 뿐이라는 깊은 의심을 마주하기도 한다. 종교적인 이유라고 적당히 에두를 법한데, 매번 쉬이 이해하지 못할 순수한 목적을 설명한다. 그의 이야기가 본인이 아닌, 어머니 준코와 여행 중 만난 두 타인의 시선으로 전해지는 탓에 진의는 마지막까지 짐작만 할 뿐이다.

텐도 아라타는 죽음의 경중을 따지는 행위는 거꾸로 살아있는 사람들의 목숨의 무게를 재단하는 것과 같다며, 차별 없이 죽음을 대하는 이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의 바람대로 시즈토는 어떠한 죽음을 맞이했든, 단 세 가지 질문으로 죽은 이를 기억한다.

“고인은 사는 동안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에게 사랑받고,
어떤 일로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았나요?”

책장을 넘기며 미처 묻지 못한 질문과 듣지 못한 답을 준코의 독백 속에서 상상했다. 눈물을 훔치며 쉬기를 몇 번 거듭하며 죽음과 탄생이 결합된 결말에 이르렀다.

더 이상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손 한 번 잡아볼 수 없다는 소설 밖 현실에는 변함이 없다. 젊고 건강했던 모습보다 아프고 약해진 모습의 기억이 짙고 그마저도 희미해져 안타까움이 커진다. 종종은 일상이라는 핑계로 잊고 지낸다는 죄책감에 빠지기도 한다.

책 한 권으로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극적인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시즈토의 애도와 준코의 병, 마키노와 유키오의 변화로 죽음과 삶의 아이러니를 자연스럽게 마음에 새겼다.

우리는 매 순간 죽고 산다. 시작점에서 끝을 향해 달려가는 레이스가 끝나는 지점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누군가, 어느 순간과의 접점에서 생사를 오간다. 우리는 살아있지만 잊혀지기도 하고, 죽었지만 기억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삶이란 오롯이 내 것이기도, 완전히 타인의 것이기도 하다.

죽은 이에 대한 시즈토의 질문은 살아있는 나를 향했다. 나는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로부터 사랑받고 싶으며, 누구에게 감사를 받고 싶은가. 책을 덮으며 죽는 순간 숫자가, 유령이 되어버리고, 잊혀지는 게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 그리고 타인을 흔한 다수가 아니라 유일한 하나로 기억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삶으로 매 순간 채워 나가기로 다짐한다.

그리고 아버지,

“당신은…… 나를 사랑해준 사람입니다.”
“당신은…… 내가 깊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사랑할 사람입니다.”

***

제목: 애도하는 사람 (悼む人, 2008)
지은이: 텐도 아라타 (天童荒太)
옮긴이: 권남희
출판: 문학동네 (2010)

***


밑줄 긋기

++ 친구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분명 친구를 사랑했습니다. ……. 그러나 그녀가 죽을 때까지 나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고 친구도 아마 그랬을 테지요. 당시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남녀 관계나 가족에 대한 애정에 한정해 생각했으니까요. 그러나 그 사람의 질문으로 친구가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 가족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고, 나와 같이 학교에 가고, 친구들과 소소한 이야기로 웃고 떠들고, 미래에 대한 불안에 떨면서 공부도 하고, 학원에서는 한숨도 쉬고, 집에 가서는 가족과 식사를 하고, 친구와 메일을 주고받고, 잠자리에 들고…… 그 모든 것이 사랑이었다는 것을. (p. 12. 프롤로그)

++ “마키노 씨라고 하셨지요. 당신은 왜 지금과 같은 삶을 살고 있나요?”

“당신이 왜 그렇게 사는지…… 간단히 답이 나오나요? 또 그렇게 사는 이유에 대해 사람들이 이해한다고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는 걸까요? 그야말로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 마키노 씨 존재의 의미는 마키노 씨가 어떻게 살든,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 남들에게 무엇을 남기는가에 있다고 바꿔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군요. 어떤 인물의 행동을 이렇게저렇게 평가하기보다…… 그 사람과의 만남으로 나는 무엇을 얻었나, 무엇을 남겼나 하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마키노 씨. 당신에게는 시즈토가 어떻게 비쳤습니까? 당신한테는 무엇을 남겼습니까? 그리고 그 아이가 애도한 사람들에 대해 알고 나서 당신에게는 무엇이 남았습니까?”

(p. 289-290. 5장 사카쓰키 준코II)

– 본문 이미지 출처: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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