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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껏 읽은 신간 에세이 둘

취향껏 읽은 신간 에세이 둘
– 판사 문유석의 <쾌락독서>와 배우 하정우 <걷는 사람, 하정우>

활자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많은 유혹이 있는 요즘, 경중을 떠나 책을 읽어보자는 마음에 광고에 혹하고 집어 든 따끈한 신간 에세이 둘에 대한 짤막한 감상.

<개인주의자 선언>, <미스 함무라비>를 쓴 판사 문유석의 <쾌락독서>는 저자의 ‘지극히 개인적인’ 독서 취향과 생각에 대한 에세이다. 경험을 이야기하는 척 하다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식으로 둔갑하는 글에 가진 나의 반감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애초에 자신의 특별할 것 없는 독서 취향에 대한 글이라고 밝힌 서두부터 무용하기에 아름다움과 마지막까지 책을 곁에 두고 싶다는 에필로그까지 단숨에 읽힌다.

너무 솔직해서, 너무 인간적이어서 ‘판사님, 이렇게 쓰셔도 되는 겁니까’라는 걱정마저 들었지만, 오래 전 풀이 한껏 죽었던 퇴근길 지하철에서 실성한 사람처럼 큭큭대며 본 <마음의 소리>만큼 아주 오랜만에 길거리에서 씨익 웃음을 지으며 책장을 넘겼다.

진솔한 경험담은 읽고 볼 것이 귀했던 그 시절 책과 음악, 거창한 명분이 아니라 정말 재미있어 읽어내려간 책의 기억과 감정을 불러들인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기 싫어 책을 파고든 그 행위조차 누군가에게 피해가 될 수 있음을, 그 순간 타인을 배려할 지 무시할 지는 선택의 문제라는 ‘돈오돈수’의 순간과 같이 많은 대목에서 공감했다. 재치 있는 문장 덕에 빠르게 읽히면서도 이렇게 공감을 많이 하며 읽은 책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책 안으로 마음이 자주 들락거린다.

이런 스타일의 글이라면 화학자들의 사생활에 관한 책이든 코털 가위 제조업계의 흥망성쇠에 관한 글이든 즐겁게 읽은 준비가 되어 있다. 좋고 이쁜 것만 보고 살기에도 짧은 인생인데 굳이 읽기 싫은 글을 이름값 때문에 힘겹게 읽으며 사서 고생할 필요 있나 싶다. – p. 54

내가 왜 이 작가의 글을 그렇게 오랫동안 좋아했는지에 대해 나 자신도 정확히 정리하지 못하고 있던 자신 없는 부분들을 작가 본인이 씩 웃으며 말해주는 느낌이었다. 응, 나도 같은 생각이었어, 라고.

그리고 그건, 책을 읽으며 마주치게 되는 순간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p. 146

좋은 글은 결국 삶 속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문장 하나하나가 비슷하게 뛰어나더라도 어떤 글은 공허하고, 어떤 글은 마음을 움직인다.

그렇다고 ‘좋은 글을 쓰려면 우선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삶은 글보다 훨씬 크다. 열심히 살든 되는대로 살든 인간은 어떻게든 각자 살아야 한다. -p.184

현재 쓸모 있어 보이는 몇 가지에만 올인하는 강박증이야 말로 진정 쓸데없는 짓이다.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것들이 필요하고 미래에 무엇이 어떻게 쓸모 있을지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무엇이든 그게 진짜로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당할 도리가 없다.

물론, 슬프게도 지금 쓸데없어 보이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고 모든 것이 언젠가 쓸모 있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실용성의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로또 긁는 소리다. 하지만 최소한 그 일을 하는 동안 즐겁고 행복했다면, 이 불확실한 삶에서 한 가지 확실하게 쓸모 있는 일을 이미 한 것 아닌가. -p.260


<걷는 사람, 하정우>는 배우 하정우의 걷기 예찬 에세이. 가볍고 진중한 역을 두루 소화해내는 마음의 깊이와 걷기가 만나면 어떨지 궁금했다. 하루 3만보 걷기, 간단한 요리는 직접, 연기, 연출, 제작, 그림, 독서 등 호기심과 열정을 여러 갈래로 이어가는 그가 쓴 글은 걷기에 집중되어 있기보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고민과 경험을 담았다.

자기 다짐으로 끝나는 마무리는 조금 아쉬웠지만, 남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무기력해질 수 있는 시간을 걷기와 배움으로 채우며 매일 성실하게 한걸음씩 나아가는 그에게서 프로와 인간적인 면모가 동시에 느껴진다.

내 갈 길을 스스로 선택해서 걷는 것, 내 보폭을 알고 무리하지 않는 것, 내 숨으로 걷는 것. 걷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묘하게 인생과 이토록 닮았다. P.41

죽을 만큼 힘든 사점을 넘어 계속 걸으면, 결국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 -p. 82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난에는 다른 사람을 찌르는 힘이, 칭찬에는 누군가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말을 최대한 세심하게 골라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내보내야 한다. 입버릇처럼 쓰는 욕이나 자신의 힘을 과시 하기 위한 날선 언어를 내가 두려워하는 이유다. -p. 186-187

우리는 실패한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타인의 평가가 내 기대에 털끝만큼도 못 미쳐 어리둥절해한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어차피 길게 갈 일’이라고. 그리고 끝내 어떤 식으로든 잘될 것이라고. -p. 231

글을 쓴다는 게 얼마나 (괴롭기에) 자학적인 취미인지 알면서도, 내가 쓴 글은 어떻게 읽힐지 노심초사 하면서도, 세상만사가 그러듯 남의 글은 이러저러하다고 평하기 쉽다. 가끔 ‘일기는 일기장에’라고 생각되어 욱하고 치미는 글들이 있는데, 생각해보면 안네 프랑크의 일기는 소녀의 시선으로 당시 참혹한 현실을 써 내려간 기록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지 않던가.

글이든 영화든 그림이든, 장르와 형태를 불문하고 감상은 읽고 보는 사람의 몫이다. 일기든 에세이든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남겼는 지로 기억된다. 몇 단어, 유치한 몇 구절이라도 누군가에 의미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그런 맥락에서 <걷는 사람, 하정우>는 산 속을 걸으며 보낸 시간을 떠올리며 그가 성장해나간 시간에 나를 투영해본 느낌이라면, <쾌락독서>는 읽는 내내 어린 시절부터 이어온 나의 독서와 그 속의 기억을 함께 끄집어 내 저자와 수다를 한바탕 떤 기분이다.

책과 자연이라는 더할 나위 없는 벗이 있는데, 많은 것에 사사로이 시간과 감정을 뺏기며 그간 잊고 지내 미안함마저 든다.

+ 이렇게 재미있게 책을 읽고 나면, 다음 책 고르기가 정말 힘들어진다. <쾌락독서> 덕분에 이미 몇 권 째 뒤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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