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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인간 (2020, 김기헌, 장근영)

시험인간 (2020, 김기헌, 장근영)
– 그러나 시험은 잘못이 없다

영양소, 역사적 사건과 연도의 조합, 왕조 순서 같은 것을 외우는 데는 영 소질이 없었다. 몇 번을 써도 머리에 남는 건 없고 종국엔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학창 시절 내신으로 그리 주목받지 못한 나는 첫 수능 모의고사에서 예상치 못한 높은 성적을 받았다. 내신이든, 모의고사든 전교 1등부터 100등까지 등수와 이름, 점수를 대대적으로 붙여 둔 학교에서 성적은 권력이었고, 시험은 권력을 쥐기 위한 수단이었다. 자율학습을 하는 공간과 순서도 등수별로 배치되어 있어 모의고사가 끝나면 성적에 따라 자리를 옮겨 다녔다.

충격적인 수능 결과로 절망도 잠시, 치열한 눈치 싸움이 시작됐다. 재수할 형편이 되지 않은 나는 최대한 안전한 선택을 했다. 비슷한 점수를 받은 한 친구는 수직 서열화된 한국 최상위 그룹 대학에, 또 다른 친구는 중위권 대학에 합격했다. 재수를 할 요량으로 지원 자격을 겨우 갖추고 될 대로 되라는 마음으로 서열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대학을 지원한 한 친구는 정원 미달로 합격했다. 학생이 된 이래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능이라는 시험 하나를 위해 달려온 것 같았다. 그리고 이 시험은 같은 전공을 택한 동갑내기 셋이 앞으로 접하게 될 교육 환경, 사람, 기회에 크나큰 차이를 가져왔다.

수능과 대학 입시가 끝나면 더는 볼 일 없을 줄 알았던 시험은 매 학기, 수업마다 이어졌다. 취업을 앞두고 각종 대기업이 만들어낸 시험을 준비도 없이 치러서 낭패를 보기도 했다. 토익은 영어 실력보다는 요령을 익혀야 고득점이 가능했다. 취업 후에도 공부의 목표는 늘 자격시험을 향해 있었다. 순수한 호기심에 시작한 공부들마저 시험으로 귀결되기 일쑤였다. 시험에는 흥미나 호기심, 배움과 앎이 주는 즐거움이 설 자리는 없었다. 빨리 많이 맞추는 요령만이 유효할 뿐이다.

시험에는 잘못이 없다. 시험은 “개인의 잠재력을 측정하고, 특정한 교육과정이 개개인에게 미친 효과를 측정”하기 위한 도구다. 문제는 시험의 결과를 인간의 가치로 보는, 시험에 중독된 사회와 그 속에 사는 차별이 내면화된 우리의 태도다.

시험을 치르는데 큰 비용과 시간이 들면 들수록 시험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자기 정당화를 거친다. 시험에 통과하지 않으면 인생이 가치가 없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개인적 차원의 문제를 넘어 시험에 통과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승자와 패자라는 선을 긋고, 통과한 자들은 시험으로 획득한 사회적 지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렇지 않은 집단과의 차별을 주장한다. 선 안에 들어오지 못한 자들은 노력과 능력이 부족한 것이라는 차별적 시선을 정당화하기에 이른다.

시험이 공명정대하다는 맹신의 저변에는 입시, 채용 등 경제, 사회 활동과 직결되는 과정에서 목도한 부조리에 따른 불신이 깔려있다. 사람의 주관적인 평가보다는 객관식, 심지어는 인공지능의 평가를 더욱 신뢰한다는 예측에 큰 반감이 들지 않는 건 깊은 불신이 낳은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구로서의 공정성이 사회적 정의를 담보하지 않는다. 시험에 이르는 환경, 맥락의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다. 수능을 치르기에 앞서 누군가는 하루하루 어렵게 생계를 지탱하는 가정에서 공부하는 반면, 누군가는 고액 과외나 학원 강의를 받는다. 수능의 고부담을 분산시키고자 도입된 학생부종합전형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학교에서 알려주는 특별활동 정도도 겨우 따라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교수인 학부모들의 품앗이, 다양한 경험을 부담 없이 제공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이들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의 시험은 공정하지 않다.

“시험의 공정성은 신화다. 더욱 큰 문제는 그 신화에 의존할 때 우리 사회의 불공정과 불평등을 당연히 여기고, 이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공정한 시험에 순종하지 않는 자로 외면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고 절차의 공정성에만 집중하는 것은 사실상 진짜 공정성을 추구할 기회를 포기하고, 허울뿐인 공정성으로 현실의 불평등을 감추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라는 지적은 여러 곳에서 제기되어 왔다.

(….) ‘교육에서 공정성을 논의할 때만큼은 교육 여건의 불평등이나 교육 정의의 문제보다 유독 공정한 대입 경쟁 문제에만 집중하는’ 양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수능 점수는 순수한 개인의 노력과 능력을 반영한 것이고, 이 점수에 따라 보상을 달리하는 사회체계를 정당한 것이라 여기는 믿음은 그저 미신일 뿐이다. 학생부종합전형만큼이나 수능시험 또한 부유한 학생과 가난한 학생이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경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수능은 공정하다고 믿으면, 그 점수에 따라서 갈라지는 인생의 길,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불평등도 모두 공정한 것으로 믿게 된다. 그래서 대입 경쟁에서 이긴 자에게 모든 가치를 몰아주고, 패배한 자에게 오히려 많은 기회를 박탈하는 사회적 불평등을 당연하게 여긴다.” – p. 161

사람들은 공정성에 대해 ‘타인들에 대해서는 공정하기를 바라지만, 나는 그 속에서 특별히 유리하기 바란다’는 양가감정을 가진다.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느꼈던 불편함이 이 책 <시험 인간>을 보면서도 줄곧 느껴진다.

사회 구조적인 불평등을 개선하려는 근본적인 논의 없이는 수능과 학생부종합전형의 비중을 높이고 낮추는 보이기식 정책 속에 불평등은 심화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합격선 안팎의 사람 모두가 이러한 차별적 시선이 초래할 비극적 결말을 인지하고 인식과 태도를 바꿔나가지 않는다면 극소수를 제외한 다수가 ‘개돼지’로 전락한 영화 <조커>의 양극화된 사회가 어느새 현실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암울하기만 한 전망에 대안은 없는가. 책 <시험 인간>에서는 여러 나라의 노력과 사례를 통해 교과목 중심의 교육을 핵심 역량 위주로 재편하고, 수업 일수나 시간을 줄이면서 교사와 교육 시스템의 경쟁력을 강화해 신뢰를 쌓아가는 것, 그래서 한 사람에 대해 시험의 결과가 아닌 다양한 측면이 함께 고려될 수 있는 구조와 문화로 바꾸어 나가기를 제안한다. 품도, 시간도 많이 들지만, 공산품을 찍어내듯 시험 훈련에 길들어 인생마저 정, 오답을 찾는 사회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람들이 창의력을 발휘하며 공존하기 위해 많은 이들이 함께 고민해야 할 지점이다. 인구감소와 정보 기술의 발전으로 산업 사회의 산물인 시험에서의 탈피가 조금은 용이해 보이는 것도 희망적이다.

사람을 기르는 교육은 사회의 근간이 되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지금,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지식 대신 태도와 행동에 초점을 맞춘 교육이 더욱 절실하다. 책 <시험 인간>은 시험에 종속되어 그런 현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의 인식과 한국의 교육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의 단서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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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험인간
지은이: 김기헌, 장근영
출판: 생각정원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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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인터넷 교보문고

본 감상은 출판사 ‘생각정원’로부터 도서를 받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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