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빈 인 더 우즈 (The Cabin in the Woods, 2011)
캐빈 인 더 우즈 (The Cabin in the Woods, 2011) …그래서 모든 유령과 귀신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 flyingneko.egloos.com/3856500 우선, 이 영화의 개봉으로 <어벤져스>의 인기와 성공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Read More캐빈 인 더 우즈 (The Cabin in the Woods, 2011) …그래서 모든 유령과 귀신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 flyingneko.egloos.com/3856500 우선, 이 영화의 개봉으로 <어벤져스>의 인기와 성공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Read More[PiFan 2012] 샤이닝: 237호의 비밀 (Room 237, 2012) http://flyingneko.egloos.com/3866476 몇몇 매니아층이 두터운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이야기할 때 종종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덕 중 최고는 양덕’이라는 말을 나누곤 했다. 이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 세계도 아니고 <샤이닝> 한 편에 100분을 고스란히 쓰겠다는 의지를 담은 제목에서부터 심상치가 않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에야 본 <샤이닝>은 ‘놀지 않고 일만 하다가는 미친놈(…)이 된다’는 훌륭한 교훈과 독특한 미장센이 인상적인 영화였는데, 이 영화에 대한 집요한 추적이라니 소개부터 궁금증을 유발하기 충분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단순히 영화 <샤이닝>에 대한 추적이나 조사가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집요한’ 추적과 추측, 그리고 큐브릭에 대한 경외로 이루어진 영화였다. 가설을 소개한 인터뷰와 더불어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들을 짜깁기해서 전개되는 영화에 실소를 금하지 못하며 허무맹랑한 추측이라는 생각으로 보다가도, 그 예상을 뛰어넘는 진지함에 ‘정말 그런 의도였어?’라는 의구심에서 ‘오 그런 의미였군’의 과정으로 발전된다. 예컨대 식료품 저장고에서 배경에 아주 잠깐 보이는 Calumet이라는 베이킹파우더 캔으로부터 ‘이 영화는 인디언 (학살)에 대한 영화’라는 가설을 던지고 추적해나가는 과정을 보자면, 호텔이 인디언을 묻은 곳 위에 지어졌다든지, 호텔 벽에 걸려 있는 인디언의 초상화며 여러 문양들을 보여주는 것까지는 어느 정도 수긍을 하다가도 영화 후반부에 잭이 미쳐 날뛸 때 캔의 로고가보이지 않게 흐트러진 것은 평화 조약이 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야기에 허무한 웃음이 나오기까지 한다. 반면에 대니가 입고 있는 셔츠의 ’42’라는 숫자와 잭의 독일제 타자기, 독수리 마크, 피바다가 되는 복도 장면을 보며 나치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암시가 포함되어 있다는 가설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 인디언 학살에 대한 것마저 그럴지도 모른다는 수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거기다 스키 시즌에 열지도 않는다는 호텔에 스키 포스터가 걸려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그리스 신화의 미노타우로스와 테세우스의 이야기를 생각하는 이들을 보며 감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대체 영화를 얼마나 여러 번 봐야 저 정도의 감상이 가능해지는 지에 대한 생각은 어느 순간 영화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로 바뀐다. 영화 장면장면을 프레임별로 끊어서 아주 천천히 돌려보는데, 의자나 벽에 있던 그림이 없어진 것을 찾아내는 것부터, 디졸브되는 부분에서 짐더미와 사람들이 겹치는 것이 나치 하의 유대인 수용소를 연상시킨다는 부분이며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간 직후 구름에서 큐브릭 얼굴이 보인다는 가설로부터 얻은 결론은, 이들의 덕력(…)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 그리고 범(凡)인인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목표는 일반 관객이 아닌 ‘아이큐 200의 스탠리 큐브릭’이니. 숱한 가설들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든 걸까? 큐브릭은 정말 천재일지도 모른다. 혹은, 특정 관객들이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일수도 있다. 전자든 후자든 한 영화가 이리도 여러 명의 ‘잭’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소품 하나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보면 볼수록 다르게 보이는 작품을 만든 감독의 능력에 경외심마저 생긴다. (그리고 덕 중 최고는 양덕인 것 같다…!) *** 제목: 샤이닝:
Read More[프랑소와 트뤼포 전작 회고전] 쥴 앤 짐 (Jules Et Jim, 1961) flyingneko.egloos.com/3854477 때는 1912년, 우연한 기회로 쥴과 짐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파리를 누빈다. 문학을 논할 때도, 여자를 만날 때도, 복싱을 할 때도 떨어지지 않던 그들 앞에 카트린이 나타나고, 카트린에게 한 눈에 반한 쥴은 짐에게 그녀와 결혼할 것이라고 자신의 단호한 의지를 밝힌다. 쥴과 카트린은 결혼식을 올리지만 이내 전쟁이 발발해 쥴은 독일군 진영에서, 짐은 프랑스군 진영에서 참전하며 서로를 죽이지 않기를 기도하고, 전쟁이 끝난 후 연락이 닿자 짐은 쥴과 카트린이 살고 있는 전원 주택을 찾는다. 그 전원주택에서 파리 근교로 오기까지 카트린은 짐과 쥴 (+알베트) 사이에서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고 질투하며, 그들의 관계는 연인과 부부, 친구 사이를 넘나든다. 이 영화의 제목이 ‘쥴과 짐, 카트린’이 아니라 <쥴 앤 짐>인데서, 이 영화가 삼각 관계에 초점이 맞춰진 영화는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카트린과 짐이 갖는 여러 관계들과는 달리, 쥴과 짐의 관계는 어떤 일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갈등은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들을 오가는 카트린을 두고도 그들의 우정은 여전하다. 카트린의 곁을 지켜달라는 부탁에 한 지붕 아래에서 생활하게 되면서도, 그들의 감정을 존중해주고 서로를 비난하지 않는 그들을 보면 육체적으로는 이성을 향해 있지만 마음은 둘을 향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덕분에 과하게 자유를 누리는 카트린에 쏟을 비난이 자리를 잡지 못한다. 전쟁을 사이에 두고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지는 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무거움을 더해간다. 젊고 발랄했던 그들이 철교를 달리던 장면이 할말을 찾지 못해 서먹해 하는 식탁에서 자동차 안으로 이동해가는 과정에서 자유롭던 그들 역시 세월의 흐름 앞에서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정착하지 못하고 도망치기만 하던 카트린의 마지막 선택은 세월 앞에서의 속수무책인 그녀의 무력감과 그리움, 그리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의 분출이 정점에 다다랐던 탓이 아닐까. 쥴과 짐의 우정과 그들이 가지는 다양한 관계를 이야기한 작가주의 영화의 대표작인 <쥴과 짐>에서는 많은 서사가 빠른 템포로 지나가고, 시대적 배경이나 흐름을 나타내는 데 다양한 기법이 활용된다. 등장인물 간의 감정 역시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또 사라지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한 인물들이 나누는 다른 감정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지나가는 장면들 속에서 인물들의 고뇌가 그리 깊지 않고, 영화의 메시지가 뚜렷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인 것 같다. 결국 카트린의 윤리 관념이나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노력하기보다는 중간중간 모차르트를 닮은 쥴의 사진이나 약속의 땅으로 향하다가 지나쳐 버린다는 내레이션과 화면과 같이 즉흥적이고 자연스러운 연출과 감정을 따라 (웃고) 즐기면 되는 영화가 아닌가 싶다. (물론 영화사적으로는 그 이상의 연구와 감상이 필요하고 이미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영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전까지는 고전 영화를 대하고, 특히 감상을
Read More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2012) – 인류의 불안과 호기심이라는 동전의 양면 flyingneko.egloos.com/3851937 몹시 피곤한 상태에서 봤음에도, 거기다 <에이리언>은 어릴 적 어디선가 본 기억조차 끈적한 느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메테우스>에 꽤 만족했다. 사실 <에이리언>의 단서가 될 수도 있는 소재가 등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를 <에이리언>의 (완벽한) 프리퀄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여튼, 2090년대의 우주 탐험이라는 설정에 걸맞은 비주얼도 비주얼이었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니 보는 내내 영화가 역으로 던졌던 질문들이 맴돌았다. 태초부터는 아니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많은 것을 창조하고 생산하고 있으며, 심지어 생명의 연장이나 복제와 같은, 어쩌면 신의 영역을 넘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근원에 대한 풀리지 않는 질문을 콤플렉스처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이 질문에 대해서 이미 많은 가설이 제기되어 왔지만 이 영화에는 누군가에 의해 인간이 설계되고 만들어졌다는 관점과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일부로부터 형성되었다는 관점이 혼재한다. 영화의 서두에서 젊은 ‘엔지니어’는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는데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데, 이는 각본을 담당한 데이먼 린드로프가 한 인터뷰에서도 밝힌 것처럼 기독교적인 관점이 아닌 신들 자체 혹은 그들의 일부를 희생해 인간을 만들어냈다는 여러 신화에서 착안한 것 같다. 복잡하게도 영화 자체는 어떤 관점도 부정하지 않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다. 기독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인류의 기원을 위해 우주선에 몸을 싣고 있는 그들의 딜레마는 어떠했을까. 동시에 절대 영역의 신이 아닌 외계의 고등 생물체로부터 자신들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발상은 신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었던 절대 영역이 ‘넘볼 수 있는’ 범위로 들어오고 기술의 발달로 그들을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게 한다. 광속으로 날아가도 2여 년간 잠들어 있어야 하는 긴 여행 끝에 무엇을 마주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보다 큰 호기심으로 잊혀진 듯 하다. 인간의 호기심은 그래서 대단하고 무섭다.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많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인간의 모습이야 굳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발견할 수 있지만, 이 영화의 제목과 그들이 탄 우주선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진흙으로 빚어 만들고 불을 준 신의 모습과 동시에 탐구에 대한 갈망, 금기를 넘어선 호기심, 그리고 이로 인한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한다. 영화는 또한 인간과 그들의 창조자 혹은 기원과의 관계를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낸 로봇을 집어 넣으면서 인간을 피조물인 동시에 창조자의 위치로 나타낸다. 여느 영화의 수동적인 로봇과는 달리 ‘데이빗’은 어느 정도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데, 로봇인 그가 인간들이 그토록 궁금해하던 자신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역으로 던졌을 때 돌아오는 인간의 답은 잔인할 정도로 무심하다. 이 때 그간 (다른 영화나 텍스트를 통해 보여졌던) 인간의 우쭐거림보다는, 자신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는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불안과 공허가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느낌이다. 어쩌면 인간의 기원 역시 그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많은 것에 답을 구하고 설명을 추가하며 복잡함을 단순함으로 혹은 더욱 복잡하게 풀어가던 사람들에게 극도의 단순함으로 말문이 막히게 한다. 이 영화가 좀 더 단순한 SF 액션 영화였다면, 고도로 발전된 미래 사회나 우주에서의 전투 장면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영화의 비주얼은 필요한 정도의 세심함을 기울이면서도 절제되어있다. <에이리언>의 징그러운 액션들을 예상한 나의 기대를 뒤엎고 도리어 묵직한 질문들을 던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재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러한 질문들을 영화로 끌어낸 감독과 제작진에 경외감마저 든다. 인간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엘리자베스가 이제 와서 인간을 왜 파괴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또 다시 우주선에 오르는 것을 보며 인간이 품고 사는 호기심이라는 독 혹은 약에 괜히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게 된다. *** 제목: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Read More스노우 화이트 앤 헌츠맨 (Snow White And The Huntsman, 2012) – 백설공주를 차용한 새로운 판타지 flyingneko.egloos.com/3848193 ‘백설공주’를 소재로 한 영화가 올 상반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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