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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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케빈에 대하여 (We Need to Talk About Kevin, 2011) – 아이가 이상할 수도 있다 http://flyingneko.egloos.com/3872835 보통 아이가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는 다른 행동을 하거나 그러한 조짐이 보일 때, 대체로 그 원인을 그 아이가 속한 환경, 즉 가정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부모, 특히 통상적으로 태어나면서부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엄마의 영향에 큰 비중을 두기마련이다. 그러나 아이의 이상 행동이나 성격이 모두 엄마의 영향에 의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태어날 때부터 아이에게 이상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신적 측면의 이상은 육체적인 부분보다 드러나지 않는다. 하여,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낌새를 챈다고 한들, 이를 과민 반응으로 치부해버리기 쉽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의 케빈은 태어날 때부터 ‘보통의 아이’ 같지 않다. 그는 마치, 엄마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아이 같다. 엄마인 에바와 함께 있을 때의 케빈은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거나 약을 올리며 에바의 신경을 바닥까지 긁는다. 그러나 아버지와 함께인 그의 모습은 그저 착한 아들일 뿐이다. 에바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 몇 번이고 다른 이에게 알리려고 하지만, 그녀 이외에는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아이에게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에바는 애 하나 어찌하지 못하는 무능한 엄마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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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의 기록영화

무서운 이야기 (2012)

무서운 이야기 (2012) – 귀신보다 무서운 현대인의 공포 http://flyingneko.egloos.com/3872064 90분 정도로 끝나는 여느 공포영화와는 다르게 네 가지 에피소드로 진행되는 덕에 상영 시간이 꽤 긴 영화는, 연쇄 살인마로 추정되는 한 사내에게 잡힌 여학생이 죽지 않기 위해 무서운 이야기를 하나 둘 풀어나가는데 이는  흡사 ‘아라비안 나이트’ 같다.두 아이가 엄마가 없는 집을 지키면서 만들어내는 공포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해와 달>을 시작으로, 연쇄살인마를 후송하는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공포 비행기>, 이런 옴니버스 공포물에 으레 등장하는 인육을 먹고 젊음을 유지하는 이들과 이들의 먹이가 되는 돈에 눈 먼 사람들의 이야기인 <콩쥐,팥쥐>, 그리고 좀비물 <앰뷸런스>까지 영화는 상영시간 내내 충실하게 보는 이를 놀래 키고 겁을 준다. 여름이면 공포라는 말이 무색하게 어느 해부터인가 여름철 극장가에서 공포 영화를 보는 것이 힘들어졌다. 짐작하건대 이는 헐리우드식이든 한국식이든 무슨 식의 공포물이 가진 정형화된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영화들이 부진을 거듭하면서 극장가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장편 영화가 감당해야 할 부담을 줄이면서 다양한 형태의 공포를 담아낼 수 있는 옴니버스 방식을 택한 것은 안전한 선택이었다. 네 편 모두가 재미와 공포를 선사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 중 한 두편이라도 괜찮으면 영화 전반에 대한 만족도가 최악으로 떨어지지는 않으니 말이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에피소드는 첫 번째였던 <해와 달>. 전설의 고향이 유행하던 그 시절에는 생각하기 힘들었을,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산물인 아파트와 택배 기사를 활용해 단절된 공간과 타인에 대한 공포를 극대화한다. 단순히 공포감을 조성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소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기도 하는데 결국 가장 무서워해야 할 대상은 이기심이 팽배한 현대 사회와 사람들이라는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함축적인 메시지와 복선을 깔고, 오히려 귀신이 아니라 사람에 몸서리치게 만든 이 에피소드만으로도 무서운 이야기는 충분히 무서웠다. 이어지는 에피소드들은 어찌 보면 지금까지 공포 영화가 사용해온 여러 장치들을 두루 사용해 현대 사회에 내재된 공포를 표현한다. <공포비행기>는 개연성이 떨어지기는 하나, 비행기라는 현대의 대표적인 교통 수단을 비행기를 밀실로 활용하면서 병든 사회의 상징인 동기 불명의 연쇄살인마의 잔혹함을 드러낸다(심지어 귀신조차 이겨버린다). <앰뷸런스>는 좀비들 사이에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극도로 치닫는 이기심과 비뚤어진 모성, 광기를 조명한다. 이 중 <콩쥐,팥쥐>는 다소 복합적인 느낌을 준다. 자신들이 가질 수 없는 부를 손에 넣기 위해 성형을 마다하지 않고, 모녀지간에 암투가 벌어진다. 돈과 권력에 눈이 먼 인간들과 이를 이용해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식인족의 이야기는 공포감보다는 불편함을 준다. (그리고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식인족이 사는 주택의 구조나 분위기가 데이빗 핀처 감독의 <밀레니엄>에 등장하는 저택의 구조와 비슷해보인다.) 참 무서운 것이 많은 세상이다. 일상에서 접하는 현대 문명의 산물이, TV에서 흔히 접하는 소재들이 공포물의 소재로도 어색함이 없는 것에 되려 우리가 매일매일 접하는 보이지 않는 공포의 무게가 느껴진다. 머리를 풀어헤치고 서서히 고개를 들며 눈을 부릅뜬 분장과 음악이 주는 무서움의 한계를 안걸까. 영화를 보고 나니 끔찍한 몰골의 귀신이 차라리 낫다. 제목에 걸맞은 무서운 이야기들과 롤러코스터에 탄 듯한 긴장감보다 병든 사회와 현대인에 내재된 불안감과 불신, 이기심이 더 큰 공포로 다가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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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의 기록영화탐구생활

다크 나이트 라이즈 (The Dark Knight Rises, 2012)

다크 나이트 라이즈 (The Dark Knight Rises, 2012) – 아쉽지만, 행복하게 마무리된 기나긴 여정의 끝 http://flyingneko.egloos.com/3869392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가 막을 내렸다. 여느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전작의 엄청난 성공이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히스 레저가 연기한 미친 악역 ‘조커’에 필적할만한 악당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기대까지 더해 잘해봐야 본전이 아닐까했다. 애초에 감독의 계획은 브루스 웨인의 배트맨의 시작에서 끝까지를 그리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내면의 두려움과 공포로 시작한 배트맨이 선과 악, 영웅과 악당의 경계에 서서 혼란을 겪다 진정한 영웅이 된다는, 이렇게만 놓고 보면 그리 색다를 것도 없는 영웅담이 탄생하게 되었을 것이다. 영웅담의 끝은 대개 그렇듯 행복하게 끝을 맺는다. 브루스 웨인은 알프레드가 흐뭇한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삶을 찾고, 폐허가 되었지만 고담시에도 평화가 찾아온다. 혹자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붓고 여느 액션 히어로와는 다른 깊이를 보여주다가 김빠진 콜라마냥 억지스럽게 끝났다고도 하지만, 정의가 승리했으나 살아 남은 이가 없는 폐허 속의 희망이라는 비극적이고 장엄한 결말만이 멋지고 그럴 듯한 건 아니지 않은가. 현실 속에서 겪는 반복적으로 겪는 소소한 절망을 스크린 속 영웅과 행복한 결말에서 위로 받고 싶었는지 웃으며 극장 밖을 나올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악당이었다. 아마 시리즈를 쭉 지켜본 사람이라면 비슷하게 느꼈을 것 같다. 평범한 사람, 선한 사람도 우연하게 벌어진 아주 불운한 일로 악당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고담시를 들었다 놨다 하는 조커에게는 이유가 없었다. 혼란의 사도라 자칭하는 조커는 혼란을 증폭시키면서 이러한 혼란의 미덕을 공평함이라고 설파하는 괴이하리만큼 뒤틀린 철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의 근원이나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반면 이번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베인과 그의 일당들의 목적은 보다 명확하다. 무엇이든 이유가 있고 설명이 가능해지면 심리적 충격의 크기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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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스크린의 기록영화

[PiFan 2012] 안전은 보장할 수 없음 (Safety Not Guaranteed, 2012)

[PiFan 2012] 안전은 보장할 수 없음 (Safety Not Guaranteed, 2012) http://flyingneko.egloos.com/3863975 제목만 얼핏 보면, 좀비가 떼로 나올 것 같다. <안전은 보장할 수 없음>이라니. 거기다 ‘조금 괴상한 슈퍼마켓 직원 케네스. 그에겐 엄청난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라는 카탈로그의 소개글도 오해의 소지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주말의 시작에 끄악대는 영화를 보러 가는 게 정신 건강에 과연 좋을 것인지 심히 고민했다. (결국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허둥지둥 택시까지 동원했다.) ‘안전은 보장할 수 없음’은 영화 속 신문의 구인 광고에 등장하는 문구이다. 요컨대 시간 여행에 함께할 사람을 구하는데,  각자의 몸은 각자 지키자는 것. 이를 취재하기 위해 기자와 인턴 둘이 길을 나서는데, 이 시점에서도 언제 나올지 모른 좀비와 <백투더 퓨처>급 시간 여행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더랬다. 그런데, 아주 마지막에서야 시간 여행과 관련된 장면이 등장한다. 오히려 이 영화는 케네스와 다리어스, 그리고 주변 인물들의 로드 무비이자 성장기에 가깝다. 건들거리며 세상을 다 아는 척하던 제프가 몇 십 년만에 만난 옛 애인에게 차이고 범퍼카에서 울먹거릴 때는 웃음이 나오다가도, 현실의 벽에 부딪혀 최악만을 생각하며 산다는 다리어스가 희망을 되찾아가고 세상에 대한불신과 단절 속에서 케네스가 한걸음 내디딜 때 괜히 가슴이 벅차 오른다. 사람과 부딪히며 받은 상처를, 그리고 생겨날 상처들을 나름의 방식으로 피하고 모른 척하던 이들이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 등장 인물들과 같이 관객의 마음마저 누그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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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미 (Remember Me, 2010)

리멤버 미 (Remember Me, 2010) – 극적이면서 극적이지 않은 삶과 죽음의 이야기 http://flyingneko.egloos.com/3863220 눈 앞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지켜본 한 여자는 지금이 마지막인 것처럼 전력을 다해 살고, 한 남자는 그 어떤 것에도 의미를 찾지 못한 채 겉돌며 시간을 보낸다. 가까운 사람, 특히 그 누군가가 가족이라면 죽음의 무게는 주변인들의 삶을 짓누르기 마련이 나이를 극복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 그 둘의 어떤 방법에 대한 옳고 그름을 쉬이 판단하기 어렵다. 사실, 그 방법이란 건 어떻게 되도 살기만 하면 된다. 예상치 못한 죽음을 만났을 때, 사람은 그렇게 된다. 자식을 잃고 멀쩡한 부모가 있을 리 없고, 형을 잃고 태연할 동생이 어디 있겠으며, 부모를 잃고 그리워하지 않을 자식이 어디있을까.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고, 대신할 수 있다면 대신하고 싶은 것.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든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든, 남아 있는 사람들은 평생 ‘왜’라는 풀리지 않을 질문을 가슴에 품고 산다. 내색을 하지 않아도 그 무게는 누구에게나 무겁다. 그러나 누군가는 균형을 잡고 냉정해지는 역할을 하게 된다. 아니, 누군가는 할 수 밖에 없다. 단편적으로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할 수 있지만 들여다보면 그 역할이 가장 어렵다. 힘들고 슬프고 아플 때 소리지르지 않고 평정을 찾는 것,죽음의 무게를 넘어 짊어져야 할 책임이 크면 억지로 한걸음씩 나아가게 된다. 그럴 수록 남은 사람들과의 거리는 줄어들지 않고 점점 상처의 골은 깊어져 간다. 스스로의 상처가 버거워 다른 이를 받아들일 만한 여유가 없다. 타일러와 앨리는 자신들을 찾아왔던 죽음처럼 우연히, 그리고 갑작스럽게 서로를 마주한다. 불같이 서로를 탐하던 시간이 지나고 그 뒤에 숨겨왔던 이야기가 펼쳐지자 앨리는 타일러를 떠난다. 형의 죽음에 매일 원망과 그리움을 오가는 타일러는 앨리를잡을 자신도, 여유도 없어 보인다. 삶이란 우연과 상실의 연속으로 이루어진걸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상처 받은 타일러와 앨리가, 그리고 타일러와 가족들이 서로의 자리에서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가장 극적이고 비극적인 음악이 흐르며 모두는 또 한 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다. 재가 흩날릴 때, 불타다 만 타일러의 일기장을 비춘 화면 위로 ‘이제는 용서할게, 사랑한다’는 말을 읊조리는 타일러의 목소리가 가슴을 깊게 울린다. 이제서야 서로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그들에게 이는 너무 잔인한 선물이었다. 영화는 대체로 무덤덤하게 이들의 삶을 바라본다. 타일러와 앨리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그들을 둘러싼 가족과 친구로 자연스럽게 확대되면서도 그 어느 누구에게도 큰 무게 중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매정해 보이는 타일러의 아버지도, 앨리의 뺨을 때리던 그녀의 아버지도, 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일러나 앨리도 비난할 수 없다. 극적이긴 하지만 어찌 보면 특별하지 않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삶처럼 남은 이들의 삶이 다시 한 번 천천히 한걸음씩 움직이고, 곁을 떠난 이들이 그 한걸음 한걸음 속에서 조용히 기억되는 모습으로 슬프지만 또 한편으로는 행복하게 마무리된다. *** 제목: 리멤버 미(Rememb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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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메이징 스파이더맨 (The Amazing Spider-Man, 2012)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The Amazing Spider-Man, 2012) – 좀 더 가볍게 돌아온 스파이더맨 http://flyingneko.egloos.com/3857425 스파이더 맨이 돌아왔다. 다른 시리즈였다면 개봉 전 경건한 자세로 전 시리즈를 복습했겠지만, 이번엔 리부트인데다 전작의 테두리에서 새로운 스파이더맨을 비교할 것 같아서 그러지는 않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번 스파이더맨은 적절한 재미와 감동을 섞은 블록버스터로 손색이 없어 보인다. 샘 레이미와 토비 맥과이어의 스파이더맨 시리즈가 첫 선을 보인지도 10년, 그 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건대 다른 것보다 캐릭터자체의 분위기가 상당히 많이 바뀌었다. 이전 시리즈의 스파이더맨은 평범하다 못해 왜소하고 우울하고, 심지어 (다른 히어로들에 비해) 가난했던 것 같은데, 특히 뜯어진 스파이더맨 쫄쫄이를 구석에서 바느질하던 토비 맥과이어의 모습에 ‘저렇게까지 히어로를 해야 하나’라는 생각에 가슴 아파했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스파이더맨 역시 물론 초반에는 미국 청소년물에서 으레 등장하는 덩치 크고 운동 좋아하는 애들에게 약간은 괴롭힘을 당하지만, 맞더라도 할 말은 하고 그리 소극적이지도 않다. 그리고체구가 작은 편도 아니라서 움츠리고 다닌다고 왜소해 보이지도 않는다. (토비 맥과이어는 175cm, 앤드류 가필드는 183cm라고 하니 8cm의 차이가 크기는 크구나..) 거미에 물려 힘이 생기는 것은 비슷하지만, 그 힘의 정도에도 차이가 있다. 자체적으로 거미줄을 생산(?)할 수 있었던 전작의 스파이더맨과 달리 이번 스파이더맨은 힘이 세지고 벽을 탈 수 있는 정도다. 대신에 아이언맨 급의 제조 기술과 추진력을 가지고있어 손목에 착용하는 기계로 바이오 케이블을 활용한, 거미줄 보다는 실리콘 혹은 낚싯줄의 느낌이 강한 줄을 뽑아낸다(덕분에통통대며 기어오는 도마뱀을 감상할 수 있다). 그 외에도 넘치는 자신감과 깐족대는 모습, 거침 없는 입담에서도 약간은 아이언맨/토니 스타크가 연상된다. 개인적인 원한을 갚는 것에서 시작해 소중한 사람을 잃고 그들을 지켜나가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모습은 여느 히어로물에나 등장할 법한 소재이지만, 철학적인 접근보다는 십대 특유의 즉흥적인 행동으로 이끌어나가는 모습이좀더 인간적으로 보인다. 이런 모습들은 무겁고 진지해진 전작의 스파이더맨보다 원작에 보다 가까운 캐릭터라는 평을 받고 있다. <트랜스포머>나 <트와일라잇>과 같은 하이틴 로맨스를 적절하게 배합해 성공을 거둔 최근 여러 시리즈와 같이 이번 <어메이징스파이더맨> 시리즈에서도 십대의 풋풋한 사랑은 빠지지 않는다. 엠마 스톤의 그웬 스테이시는 스파이더맨과 마찬가지로 자신감이 넘치고 당당해 ‘메리 제인’보다는 (<트랜스포머 1,2>의) ‘미카엘라’에 더 가까운 느낌이다. 스파이더맨의 설정 자체가 십대 히어로임에도 무거워진 전작 스파이더맨은 살리지 못했던 특유의 생기 발랄함이 이번 스파이더맨에서 돋보인다. 다만, 캐릭터 자체에서 무게가 덜어지니 영화 역시 다소 가벼워진 감이 있다. 요즘 요행하는 시리즈물의 이것저것을 섞어 보기 괜찮은 영화를 만들기는 했지만, 디테일을 채우는 면은 다소 미흡하다. 공식 하나로 몇 년을 끌어온 이종 교배실험이 성공한다든지, 이렇게 완성된 약에 대한 해독제가 짧은 시간에 뚝딱 만들어진다든지 가볍게 보면서도 갸우뚱할만한 논리적 비약이 아쉽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또 다른 아쉬운 점을 꼽으라면, 파충류와 결합한 커트 코너스 박사의 모습이 악당이라고 보기에는 좀 귀엽지(….) 않았나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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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의 기록영화

캐빈 인 더 우즈 (The Cabin in the Woods, 2011)

캐빈 인 더 우즈 (The Cabin in the Woods, 2011) …그래서 모든 유령과 귀신이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됐다?  flyingneko.egloos.com/3856500  우선, 이 영화의 개봉으로 <어벤져스>의 인기와 성공이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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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스크린의 기록영화

[PiFan 2012] 샤이닝: 237호의 비밀 (Room 237, 2012)

[PiFan 2012] 샤이닝: 237호의 비밀 (Room 237, 2012) http://flyingneko.egloos.com/3866476 몇몇 매니아층이 두터운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이야기할 때 종종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덕 중 최고는 양덕’이라는 말을 나누곤 했다. 이 영화는 스탠리 큐브릭의 작품 세계도 아니고 <샤이닝> 한 편에 100분을 고스란히 쓰겠다는 의지를 담은 제목에서부터 심상치가 않다. 개인적으로는 최근에야 본 <샤이닝>은 ‘놀지 않고 일만 하다가는 미친놈(…)이 된다’는 훌륭한 교훈과 독특한 미장센이 인상적인 영화였는데, 이 영화에 대한 집요한 추적이라니 소개부터 궁금증을 유발하기 충분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단순히 영화 <샤이닝>에 대한 추적이나 조사가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집요한’ 추적과 추측, 그리고 큐브릭에 대한 경외로 이루어진 영화였다. 가설을 소개한 인터뷰와 더불어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들을 짜깁기해서 전개되는 영화에 실소를 금하지 못하며 허무맹랑한 추측이라는 생각으로 보다가도, 그 예상을 뛰어넘는 진지함에 ‘정말 그런 의도였어?’라는 의구심에서 ‘오 그런 의미였군’의 과정으로 발전된다. 예컨대 식료품 저장고에서 배경에 아주 잠깐 보이는 Calumet이라는 베이킹파우더 캔으로부터 ‘이 영화는 인디언 (학살)에 대한 영화’라는 가설을 던지고 추적해나가는 과정을 보자면, 호텔이 인디언을 묻은 곳 위에 지어졌다든지, 호텔 벽에 걸려 있는 인디언의 초상화며 여러 문양들을 보여주는 것까지는 어느 정도 수긍을 하다가도 영화 후반부에 잭이 미쳐 날뛸 때 캔의 로고가보이지 않게 흐트러진 것은 평화 조약이 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야기에 허무한 웃음이 나오기까지 한다. 반면에 대니가 입고 있는 셔츠의 ’42’라는 숫자와 잭의 독일제 타자기, 독수리 마크, 피바다가 되는 복도 장면을 보며 나치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암시가 포함되어 있다는 가설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 인디언 학살에 대한 것마저 그럴지도 모른다는 수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거기다 스키 시즌에 열지도 않는다는 호텔에 스키 포스터가 걸려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다가 그리스 신화의 미노타우로스와 테세우스의 이야기를 생각하는 이들을 보며 감탄을 금할 수 없게 된다. 대체 영화를 얼마나 여러 번 봐야 저 정도의 감상이 가능해지는 지에 대한 생각은 어느 순간 영화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로 바뀐다. 영화 장면장면을 프레임별로 끊어서 아주 천천히 돌려보는데, 의자나 벽에 있던 그림이 없어진 것을 찾아내는 것부터, 디졸브되는 부분에서 짐더미와 사람들이 겹치는 것이 나치 하의 유대인 수용소를 연상시킨다는 부분이며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간 직후 구름에서 큐브릭 얼굴이 보인다는 가설로부터 얻은 결론은, 이들의 덕력(…)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 그리고 범(凡)인인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목표는 일반 관객이 아닌 ‘아이큐 200의 스탠리 큐브릭’이니. 숱한 가설들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든 걸까? 큐브릭은 정말 천재일지도 모른다. 혹은, 특정 관객들이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일수도 있다. 전자든 후자든 한 영화가 이리도 여러 명의 ‘잭’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에서, 소품 하나하나 허투루 쓰지 않고 보면 볼수록 다르게 보이는 작품을 만든 감독의 능력에 경외심마저 생긴다. (그리고 덕 중 최고는 양덕인 것 같다…!) *** 제목: 샤이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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쥴 앤 짐 (Jules Et Jim, 1961)

[프랑소와 트뤼포 전작 회고전] 쥴 앤 짐 (Jules Et Jim, 1961)  flyingneko.egloos.com/3854477  때는 1912년, 우연한 기회로 쥴과 짐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파리를 누빈다. 문학을 논할 때도, 여자를 만날 때도, 복싱을 할 때도 떨어지지 않던 그들 앞에 카트린이 나타나고, 카트린에게 한 눈에 반한 쥴은 짐에게 그녀와 결혼할 것이라고 자신의 단호한 의지를 밝힌다. 쥴과 카트린은 결혼식을 올리지만 이내 전쟁이 발발해 쥴은 독일군 진영에서, 짐은 프랑스군 진영에서 참전하며 서로를 죽이지 않기를 기도하고, 전쟁이 끝난 후 연락이 닿자 짐은 쥴과 카트린이 살고 있는 전원 주택을 찾는다. 그 전원주택에서 파리 근교로 오기까지 카트린은 짐과 쥴 (+알베트) 사이에서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고 질투하며, 그들의 관계는 연인과 부부, 친구 사이를 넘나든다. 이 영화의 제목이 ‘쥴과 짐, 카트린’이 아니라 <쥴 앤 짐>인데서, 이 영화가 삼각 관계에 초점이 맞춰진 영화는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카트린과 짐이 갖는 여러 관계들과는 달리, 쥴과 짐의 관계는 어떤 일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갈등은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그들을 오가는 카트린을 두고도 그들의 우정은 여전하다. 카트린의 곁을 지켜달라는 부탁에 한 지붕 아래에서 생활하게 되면서도, 그들의 감정을 존중해주고 서로를 비난하지 않는 그들을 보면 육체적으로는 이성을 향해 있지만 마음은 둘을 향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덕분에 과하게 자유를 누리는 카트린에 쏟을 비난이 자리를 잡지 못한다. 전쟁을 사이에 두고 전반과 후반으로 나누어지는 영화는 후반으로 갈수록 무거움을 더해간다. 젊고 발랄했던 그들이 철교를 달리던 장면이 할말을 찾지 못해 서먹해 하는 식탁에서 자동차 안으로 이동해가는 과정에서 자유롭던 그들 역시 세월의 흐름 앞에서 무너지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정착하지 못하고 도망치기만 하던 카트린의 마지막 선택은 세월 앞에서의 속수무책인 그녀의 무력감과 그리움, 그리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의 분출이 정점에 다다랐던 탓이 아닐까. 쥴과 짐의 우정과 그들이 가지는 다양한 관계를 이야기한 작가주의 영화의 대표작인 <쥴과 짐>에서는 많은 서사가 빠른 템포로 지나가고, 시대적 배경이나 흐름을 나타내는 데 다양한 기법이 활용된다. 등장인물 간의 감정 역시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또 사라지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한 인물들이 나누는 다른 감정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지나가는 장면들 속에서 인물들의 고뇌가 그리 깊지 않고, 영화의 메시지가 뚜렷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인 것 같다. 결국 카트린의 윤리 관념이나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 노력하기보다는 중간중간 모차르트를 닮은 쥴의 사진이나 약속의 땅으로 향하다가 지나쳐 버린다는 내레이션과 화면과 같이 즉흥적이고 자연스러운 연출과 감정을 따라 (웃고) 즐기면 되는 영화가 아닌가 싶다. (물론 영화사적으로는 그 이상의 연구와 감상이 필요하고 이미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영화를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관객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이전까지는 고전 영화를 대하고, 특히 감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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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2012)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2012) – 인류의 불안과 호기심이라는 동전의 양면 flyingneko.egloos.com/3851937  몹시 피곤한 상태에서 봤음에도, 거기다 <에이리언>은 어릴 적 어디선가 본 기억조차 끈적한 느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메테우스>에 꽤 만족했다. 사실 <에이리언>의 단서가 될 수도 있는 소재가 등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를 <에이리언>의 (완벽한) 프리퀄로 해석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여튼, 2090년대의 우주 탐험이라는 설정에 걸맞은 비주얼도 비주얼이었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니 보는 내내 영화가 역으로 던졌던 질문들이 맴돌았다. 태초부터는 아니었을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그 옛날부터 지금까지 많은 것을 창조하고 생산하고 있으며, 심지어 생명의 연장이나 복제와 같은, 어쩌면 신의 영역을 넘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근원에 대한 풀리지 않는 질문을 콤플렉스처럼 지니고 있기도 하다.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 이 질문에 대해서 이미 많은 가설이 제기되어 왔지만 이 영화에는 누군가에 의해 인간이 설계되고 만들어졌다는 관점과 누군가 혹은 무언가의 일부로부터 형성되었다는 관점이 혼재한다. 영화의 서두에서 젊은 ‘엔지니어’는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는데 자신의 몸을 희생하는데, 이는 각본을 담당한 데이먼 린드로프가 한 인터뷰에서도 밝힌 것처럼 기독교적인 관점이 아닌 신들 자체 혹은 그들의 일부를 희생해 인간을 만들어냈다는 여러 신화에서 착안한 것 같다. 복잡하게도 영화 자체는 어떤 관점도 부정하지 않고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다. 기독교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인류의 기원을 위해 우주선에 몸을 싣고 있는 그들의 딜레마는 어떠했을까. 동시에 절대 영역의 신이 아닌 외계의 고등 생물체로부터 자신들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발상은 신이었다면 상상할 수 없었던 절대 영역이 ‘넘볼 수 있는’ 범위로 들어오고 기술의 발달로 그들을 추적하는 것이 가능하게 한다. 광속으로 날아가도 2여 년간 잠들어 있어야 하는 긴 여행 끝에 무엇을 마주칠 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보다 큰 호기심으로 잊혀진 듯 하다. 인간의 호기심은 그래서 대단하고 무섭다.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많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인간의 모습이야 굳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발견할 수 있지만, 이 영화의 제목과 그들이 탄 우주선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을 진흙으로 빚어 만들고 불을 준 신의 모습과 동시에 탐구에 대한 갈망, 금기를 넘어선 호기심, 그리고 이로 인한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한다. 영화는 또한 인간과 그들의 창조자 혹은 기원과의 관계를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이 만들어낸 로봇을 집어 넣으면서 인간을 피조물인 동시에 창조자의 위치로 나타낸다. 여느 영화의 수동적인 로봇과는 달리 ‘데이빗’은 어느 정도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데, 로봇인 그가 인간들이 그토록 궁금해하던 자신의 기원에 대한 질문을 역으로 던졌을 때 돌아오는 인간의 답은 잔인할 정도로 무심하다. 이 때 그간 (다른 영화나 텍스트를 통해 보여졌던) 인간의 우쭐거림보다는, 자신의 근원을 알지 못한다는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불안과 공허가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느낌이다. 어쩌면 인간의 기원 역시 그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많은 것에 답을 구하고 설명을 추가하며 복잡함을 단순함으로 혹은 더욱 복잡하게 풀어가던 사람들에게 극도의 단순함으로 말문이 막히게 한다. 이 영화가 좀 더 단순한 SF 액션 영화였다면, 고도로 발전된 미래 사회나 우주에서의 전투 장면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영화의 비주얼은 필요한 정도의 세심함을 기울이면서도 절제되어있다. <에이리언>의 징그러운 액션들을 예상한 나의 기대를 뒤엎고 도리어 묵직한 질문들을 던진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재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러한 질문들을 영화로 끌어낸 감독과 제작진에 경외감마저 든다. 인간이 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엘리자베스가 이제 와서 인간을 왜 파괴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또 다시 우주선에 오르는 것을 보며 인간이 품고 사는 호기심이라는 독 혹은 약에 괜히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게 된다. *** 제목: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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